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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와 딸의 ‘할머니 쟁탈전’

베이비트리 2014. 10. 17
조회수 12798 추천수 0
[기획] 저녁 있는 삶
② 날마다 사표 쓰는 여자

경력단절 ‘야근 탓’ 큰데
근본 대책 없이 겉돌아

“이번 정부 임기 안에 여성 경력단절이라는 용어가 사라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난 2월 당시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임신·출산·육아 문제로 ‘워킹맘’이 사직서를 던지는 일을 막는 게 저출산 대책의 핵심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확대, 아빠 육아휴직 도입 등의 대책을 내놨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15일 시간선택제 일자리 및 여성고용 후속 대책으로 관련 일자리를 연말까지 3000개를 창출하고 기업의 어린이집 기부를 유도한다는 대책을 내놨다. 그러자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비판 성명을 냈다. 여성연합은 “박근혜 정부가 여성노동 현실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여성이 경력단절을 경험하는 주요 원인은 불안정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일과 생활을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임신·출산·양육은 단지 경력단절의 계기일 뿐이다. 남성의 돌봄(보육) 참여와 사회적 지원을 통해 부모와 사회가 모두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를 지향해야 여성의 경력단절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고 했다. 맞벌이 부부가 육아휴직 1년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면 저출산 문제는 해결될까. 보육시설을 늘리면 워킹맘들은 경력단절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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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경력단절 막으려면 
근로기준법의 8시간 노동이 
육아휴직보다 더 중요

■ 할머니 쟁탈전 워킹맘을 경력단절 위기로 내모는 주범은 일상화한 야근이다. 엄마는 아침 9시 출근, 저녁 6시 퇴근을 못하는데 아이를 맡길 보육시설 대부분은 아침 9시에 문을 열고 저녁 6시에 문을 닫는다. 대다수 워킹맘의 출퇴근 패턴과는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경력단절을 막아주는 건 정부의 보육료 지원이나 어린이집 확충이 아니라 ‘24시간 전일제 보육’을 해주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다.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이 도내 맞벌이 300가구를 조사한 ‘맞벌이 가정 내 조부모의 양육 현황 및 지원방안 연구’(2011)를 보면 조부모에게 육아를 맡기는 이유에 대해 ‘양육시간 조절이 쉽다’는 대답이 32%에 달한다. 대전의 한 병원 의사 박소연(가명·34)씨는 지난해 면접 자리에서 ‘애는 누가 봐주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면 취직할 수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맡아주시는 게 다행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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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정 양립 위해 ‘당당한 6시 퇴근’을 허하라

자녀를 여럿 둔 조부모의 경우 맞벌이를 하는 며느리와 딸 양쪽의 손주 2~3명을 맡아 키우는 일도 많다. 대기업 직원 김선희(가명·35)씨는 “엄마가 원래 언니네 아이 둘을 키워주고 계셨다. 나도 별수 없어 친정 근처로 이사간 뒤 아이를 맡겼는데 갓난아기까지 맡아 키우다 보니 엄마가 부쩍 늙으셨다”고 했다. 시어머니에게 두 아이를 맡긴 워킹맘 손지영(가명·36)씨는 “간호사로 일하는 동서가 아이를 낳았지만, 어머니가 힘들다는 이유로 맏손주만 맡아주신다고 선언해 중간에서 참 곤란했다”고 했다.

대리급 이상 관리직 여성 2361명을 대상으로 한 여성가족부의 ‘여성인력패널조사’(2012)를 보면, 3살 미만 자녀를 둔 응답자 중 63.6%는 친정부모 또는 시부모가 자녀 보육을 담당한다고 했다. 등·하원 시간이 정해져 있는 보육시설 이용 비율은 29.1%에 그친다.

정진주 사회건강연구소장은 “여성들은 미혼일 때 남성과 똑같이 경쟁하지만, 출산 이후 보육 문제로 경쟁력을 상실한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은 보육 문제를 일시적으로 지연시킬 뿐이다. 보육시설 노동자 역시 대다수가 잠재적 워킹맘이므로 보육시간을 한없이 늘리는 것도 진짜 대안은 아니다. 워킹맘의 경력단절을 막기 위해서는 ‘불이익 없는 퇴근 문화’의 정착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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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9살 ‘양육시기’ 여성 64% 
이미 주당 40시간 이하 일자리 
‘시간선택제 확대’로는 한계

■ 8시간 노동만 지켜도 고용노동부가 펴낸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종업원 300명 이상 기업에서 육아휴직 중인 직원이 있는 기업의 비율이 2011년 69.9%에서 지난해 76.1%로 늘었다. 영세업체의 경우 육아휴직 보장이 안 되는 경우가 많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은 육아휴직 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다.

육아휴직도 중요하지만 워킹맘에게 절실한 것은 근로기준법이 정한 ‘8시간 노동’이다. 김선희씨는 2012년 아이를 낳고 복직했지만 1년여 만에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저녁 8시면 퇴근하는 ‘이모님’ 시간에 맞추기 위해 남편이 월·수·목, 내가 화·금 야근을 하는 식으로 일해왔다. 그런데 경기가 안 좋으니 감원 얘기도 나오고, 남편도 아이를 핑계로 더 이상 칼퇴근을 못하겠다고 하더라. 나 역시 야근을 못하니 회사에서 눈치가 보였다. 이럴 바에야 여자인 내가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가 여성들의 경력단절을 막는 대책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워킹맘들은 이미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단시간 일자리를 선택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08년 조사를 보면 자녀 양육 시기에 있는 30~39살 여성의 63.6%는 주당 40시간 이하로 일을 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연령대에 견줘 가장 높은 비율이다.

출판 관련 회사에 다니다 3살 아이 양육 문제로 지난해 퇴사한 정은진(가명·33)씨 역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찾는다. 그는 “아이가 엄마·아빠 얼굴을 주말에만 보니까 정서 불안 증세가 나타났다. 이렇게까지 일해서 뭐하나 싶었다. 출퇴근하는 자리 말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취업여성 53%는 비사무직인데 
정부 대책 사무직에만 맞춰져 
전문직도 출산휴가는 ‘사치’

■ 사무직 여성에만 집중된 대책 지금까지 정부가 내놓고 있는 경력단절 여성 대책은 사무직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전체 취업여성 중 30.5%는 서비스 및 판매직이다. 22.9%는 단순노무직 등에 종사한다. 실제 생산직 여성들은 임신하는 순간 퇴사를 강요당하는 일이 많아 육아휴직은커녕 출산휴가조차 챙기지 못하는 일이 많다.

경기 시화·반월 공단 생산직인 이미진(가명·39)씨는 “제조업은 아이를 가지면 힘이 덜 드는 생산라인으로 전환배치하지 않고 그냥 그만두게 한다. 임신으로 그만두는 거라 실업급여도 못 받는다”고 했다.

변호사와 의사 등 전문직도 ‘출산휴가 3개월’은 사치다. 3년 전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를 2개월만 썼다는 변호사 박혜은(가명·35)씨는 “그래도 우리 로펌은 대표변호사가 여자라 괜찮은 편이다. 출산하고 한달 만에 나오라고 하는 로펌이 태반이다. 제대로 육아휴직을 쓰려면 로펌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1년 동안 경력단절이 되면 재취업이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했다. 대형병원 의사 유재연(가명·39)씨는 “아이 낳고 바로 출근했다는 얘기를 무용담처럼 하는 선배들이 여전히 있다. 큰 병원은 그래도 3개월 출산휴가가 가능한데, 육아휴직을 쓰는 여의사를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한겨레 신문 2014년 10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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