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 고릴라
옆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 지음, 장은수 옮김/비룡소·8500원
앤서니 브라운은 이 시대의 가장 인기 있는 그림책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새 작품이 실시간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되는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그림책 거장의 작품 중에도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적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인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성실하다. 비현실적 환상이 넘치는 그림이기에 더욱 세밀하게 한 올 한 올 펜 터치로 그려낸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이 시대 아이들이 처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폭력과 가정의 해체, 자기 일에 빠져 아이들을 돌보기 어려운 부모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행복보다는 그들이 놓인 불행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어린이책 고전을 비틀어 현재 아이들이 놓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의 특기이다. 빨간 망토와 늑대 이야기, 헨젤과 그레텔, 곰 세 마리와 같이 익숙한 동화들이 <숲 속에서> <터널> <나와 너> 같은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굳이 고전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림책을 읽어주는 부모와 아이의 소통을 위해서이다. 부모는 어린 시절 익숙한 이야기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아이들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그림책을 읽어주며 느낄 수 있다.
<고릴라>는 그의 출세작이다. 많은 어른들은 우선 갸우뚱한다. 고릴라가 뭐지? 스스로 말했듯이 고릴라는 그의 어린 시절 아버지 모습이다. 인간 이전에 고릴라가 있었듯이 지금 부모 이전에 살았던 좀더 원초적인 부모의 모습이다. 이 시대 부모들은 너무 바쁘다. 아이를 위해, 행복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아이가 바라는 아이와의 시간은 내지 못한다. 얼마 살지 못하는 삶인데도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을 여유는 없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무엇을 하라고 말하고 무엇을 잘했는지 검사하지만 함께 즐기지는 못한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행복은 계속 미래로 미뤄둔다.
이게 이 시대 인간의 모습이라면 차라리 고릴라가 낫다. 어리석어 보이고, 본능만 있어 보이지만 차라리 더 ‘인간적’이다.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도 행복한 순간을 즐기는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부모이건만 우리는 더 대단한 부모를 꿈꾸며 정작 그저 그런 부모조차 되지 못한다. 보통의 부모라면, 본능대로 다가가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부모라면 아이는 그 속에서 충분히 잘 자랄 수 있다. 소아정신과의 개척자인 도널드 위니콧 박사가 말한 ‘이만하면 충분히 좋은’ 부모는 그런 부모이다.
그림책에서 아빠는 아이와 시간을 내기 어렵다. 아이는 아빠와의 교류를 통해 더 자라고 싶지만 아빠는 집에 와서도 일해야 한다. 그래서 아이는 꿈속에서 소망을 실현한다. 아빠가 사준 작은 고릴라 인형이 멋진 고릴라로 변한다. 아빠 옷을 입은 고릴라와 함께 동물원을 가고, 극장을 가고, 저녁 식사를 한다. 마지막 이마에 입맞춤까지 온전히 데이트를 즐긴다. 그렇다. 아이들은 꿈을 꿔서라도 소망을 이루고 싶다. 그렇게 부모를 사랑하고, 자라고, 성장하고 싶다. 부모가 할 일은 그런 아이의 옆에 그저 머무는 것. 그런데 그것이 너무도 어려운 현대를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그림 비룡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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