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억이나 할까?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됐을 때 엄마가 앓았던 갑상선 호르몬 항진증 때문에 너는 그 얇디얇은 혈관에 바늘을 꽂아 피를 뽑아내야 했지. 몇 번 시도한 끝에 겨우 성공했는데 너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어댔어. 엄마가 예전에 호르몬 수치가 높아서 너도 그렇지 않은지 검사해야 한다 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니 검사고 뭐고 다 그만둬 버리고 싶은 생각만 들었어. 그때 엄마도 너를 따라 울었단다. 자존심 극강인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울었단다. 그리고 다짐했지. 다시는 너한테 미안한 일 같은 건 없도록 하겠다고.
그래서일까? 엄마는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아니 미안한 마음조차 가졌던 적이 없는 것 같아. 직장을 다니는 엄마이건 집에서 애만 키우는 엄마이건 그냥 자식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는데 엄만 그렇지 않았다. 친구들한테는 모성애란 과장된 거라고 힘주어 얘기했지만 속으로 모성애가 없는 나 자신이 정상인건지 의아했고 불안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냥 엄마의 특이한 성격 중 하나라고 결론 내렸지. 그리고 그저 네 편이 되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거야.
그래서 엄마가 너를 키우다 너무 힘들어서 네가 우는 걸 달래주지 않고 30분이나 그냥 놔두었을 때도 미안해하지 않았어. 네가 이유식 먹다 그릇에 손을 넣고 주무르고 뭉개고 해서 소리를 빽 질렀을 때도 미안하다고 생각 안했어. 네 살이 되어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너를 맡겼을 때 바닥에 누워 울고불고 떼를 쓰는 너를 두고 돌아설 때도 그냥 지나가는 과정이려니 생각했어. 유치원에 진학해서 가끔 가기 싫다고 할 때도 어림없는 소리 말라며 너를 다그치고 억지로 보내곤 했을 때 엄만 애써 저러다 말겠지 했다. 동생이 생겨 스트레스 받는 너를 보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하고 갓난아기만 돌봤지. 너한테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외면해버렸어. 그래도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너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미안해. 얼마 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하고 수많은 생명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그 때만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정도였어. 그런데 구조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고 진상 규명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 그런데도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고 누군가를 공공의 적으로만 만들어 국민들의 분노를 피하려고만 하더구나. 이런 나라에서 너를 살게 한 어른으로서 엄마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네가 자는 모습, 먹는 모습, 환하게 웃는 모습만 봐도 엄마는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다. 그동안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너한테 미안해하지 않은 엄마여서 미안해.
사랑하는 딸. 엄마가 근래에 어디선가 읽은 내용 중 마음에 남는 게 있어. 투표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모두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다고. 누군가는 그것으로 권리 행사는 다 했고 할 일도 모두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그건 정말로 아닌 것 같다. 진정한 개혁과 변화는 외치고 싸우고 투쟁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엄마는 좀 늦게 안 것 같아. 그래서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