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사진 자료 ::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엄마가 미안해' 편지 공모전 미안해상 수상작]
우리, 뜨겁고 진한 사랑을 나눠가지며
하윤이에게
이제 곧 장마가 온다는데, 벌써 절반이나 지난 올해가 새삼 믿기지 않기도 해. 다음 주면 하윤이가 태어난 지 22개월. 하루하루 하윤이는 훌쩍 자라나는데, 엄마는… 엄마는 지금 괜찮은 걸까?
요즘 들어 하윤이를 대하는 엄마 마음이 시시각각 변덕스럽게 바뀌는 거 있지. 한없이 사랑스럽다가도,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고, 그러다 미안해져서 토닥거리며 꼭 안아 주곤 해. 정성껏 만들어 놓은 밥은 안 먹고 군것질거리만 찾을 때면 속상해서 울고 싶다가, 에라 모르겠다 던져 준 사탕을 먹고 배시시 애교 부리며 웃는 널 보면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일요일 오후, 터벅터벅 집을 나와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도 질리지 않는 너의 파라다이스, 놀이터를 찾았지. 미끄럼틀에 거꾸로 올라타며 신이 난 너를 물끄러미 보는데, 아빠가 전화를 했어. 아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어.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장례식장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단다. 검은 양복을 입고 하윤이에게 다가오는 친척들이 낯설고 무서웠는지, 하윤이는 엄마 옆에 꼭 붙어 있더라. 다들 하윤이가 반가워서 그러는 건데 하윤이는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이 무서웠나 봐.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 엄마를 찾아 헤매는 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단다. 엄마를 발견하곤, 안심과 서운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엄마를 울부짖으며 달려온 너. 그런 너를 꼭 안는데, 네 몸이 무지 뜨겁다고 생각했어. 뜨겁고 진하게 온몸과 마음으로 엄마를 원하는 하윤이. 그런 널 안으면서, 지금 우리는 정말 사랑을 나눠 가지고 있구나 느꼈단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부모자식 간의 끈적거리는 사랑도 분명 유통기한이 있는 것 같아. 지금 너와 나 사이엔 유통기한이 없을 것처럼 하루하루가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 하윤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엄마와 점점 거리를 둘 테지. 그 또한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일 테고.
하윤이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장.
‘엄마’를 떠나보낸 나이 든 자녀들의 깊게 패인 주름과 어두운 표정 사이로, 켜켜이 쌓아 올린 가족의 시간이 저 멀리 흘러가는 것 같았단다. “잘 가, 엄마” 하고 나지막이 내뱉은 네 할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허공에 흩날려 모두의 마음에 내려앉은 듯했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세월이 있었을 거야. 그 세월을 넘어, 하늘나라로 ‘엄마’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어떠할까. 오래된 가족의 시간은 이제 어디로 갈까.
삶과 죽음 앞에 든 허탈함에 그저 눈물이 날 때, 모두가 말없는 얼굴로, 시선 둘 곳을 찾고 있는 것만 같을 때, 장례식장 곳곳을 총총걸음으로 돌아다니는 하윤이 너와 네 사촌들이 보이더구나. 아직 어린 너희들이 지금 이 상황을 알 턱이 없지. 하룻밤 자고 나니 이제 조금 낯익은지 친척들을 한결 편하게 대하더구나. 친척들 사이를 오가며 살짝 애교를 부릴까 하다 수줍어 돌아서고, 빽 소리를 지르며 웃기도 해보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손도 잡아 보는 너와 네 사촌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단다.
그래, 너희가 있지. 오래된 가족의 시간이 멈추지 않는 까닭이 너에게 있는 거야, 하윤아.
말없는 슬픔으로 찾아 헤맨 건, 그럼에도 계속되는 가족의 시간과 역사일지 모르겠구나. 너가 있기에 엄마가 있고, 엄마가 있기에 엄마의 ‘엄마’가 있고, 그렇게 계속되어 오는지도…. 그러자 엄마로서 스스로를 좀 더 또렷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어. 그저 엄마라는 단어만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엄마’임을 몸소 느끼게 하는 그러한 힘을 필요함을 느꼈단다. 지금 엄마에게는 그런 힘이 필요한 것 같아. 쉽게 지치지 않는 힘. 엄마의 힘, 말이지.
하윤아. 나날이 자라는 너처럼, 엄마도 발맞추어 함께 자라날게.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안의 감정선이 서로 날을 세우고, 얕은 인내심을 후회하고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자책에 우울할 때도 있지만… 조금씩 천천히 단단해질게.
우리가 그려 나갈 미래는 좀 더 건강하고 즐거우리라 믿어, 하윤아.
미래를 품게 해 준 너에게, 고맙고 또 고마워.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