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땀흘리고 놀며 사회성과 상상력을 기르고 ‘우리’를 깨친다… 
몸으로 노는 것은 세계적인 트렌드, 얘들아 이제 나가 놀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 넷이 폴짝 뛰어오르다가, 쿵 떨어졌다. 생과 사가 갈린다. “너 죽었어, 나가!” 밟으면 죽는다. 선생님도 안 봐주는 엄중한 고무줄의 세계다. 4월2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동네책방’ 지하에 있는 문화공간 ‘올챙이랑 달팽이네’에서는 아이들이 검은 두 줄에 매달려 있었다. 놀이에 살고 죽는 아이들이다.

토요일에 인터넷만 해? 공부만 해?

그런데 호모루덴스의 자식들은 퇴화 중이다. 고무줄 놀이는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요즘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를 모른다. 사방치기, 비석치기, 다방구도 못한다. 여럿이 모여 몸 쓰고 힘쓰고 뛰어다니는 동네 놀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동네책방 정영화 대표는 “요즘 아이들이 할 줄 아는 놀이가 만들기나 접기밖에 없어서 놀이 능력도 퇴화됐다. 아이들이 몸이 둔하고 뛰질 못하니 술래 한 명으로는 놀이가 안 된다. 힘들면 주저앉기 일쑤고 술래가 잡은 아이들을 잘 데리고 있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놀이에서 어리거나 약한 친구를 봐주는 ‘깍두기’가 사라진 것도 놀랍다. 남을 배려하며 놀 여유가 없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인터넷을 하며 논다. 지난 1월 서울시 청소년활동진흥센터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토요일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초·중·고생 56.7%가 ‘컴퓨터 게임 및 인터넷을 한다’고 했고 53.9%가 ‘TV를 시청한다’고 했다. 놀이 수준이 떨어지기는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 안에서도 차별은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39.6%)과 독서실(19.5%)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60%가 인터넷과 게임에 쏠려 있다. ‘노는 토요일(놀토)에 어떤 과학 프로그램을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도 형편이 되는 아이들은 인터넷 말고도 천체 관측이나 영상 활동, 생명과학 등을 고루 들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은 공짜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인 인터넷에만 쏠려 있다. 청소년 주말 활동센터 안진우 팀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돈이 드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경험해볼 기회가 없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을 짤 때 가장 고려해야 할 게 소득 문제다. 학교에서 놀토 프로그램을 열면 참가비를 못 내 그나마도 참여 못하는 아이가 많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놀토 이후 더 바빠진 아이들도 있다.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새 이야기’ 강연을 해온 생태동화작가 권오준씨는 “경기도 성남의 분당이나 서울 강남의 초등학교 아이들은 5학년 때부터는 책을 잘 읽지 못한다. 시험 준비 말고는 아무것도 못한다. 희망도 없고 답도 없다”고 했다.

레고를 닮아가는 아이들

놀이는 다리 힘을 키우고 눈치를 넓힌다. 체력도, 사람을 관리하는 능력도, 상상력도 기른다. 동네책방 정영화 대표는 “잘 노는 아이들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건강하고 자기주도성이 뛰어나며 매사에 적극적이에요. 놀아보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감이 없고 작은 실패에도 힘들어해요.” 지난해 11월부터 하루 세끼 밥 먹듯 매일매일 꼬박꼬박 놀아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올챙이랑 달팽이네’에서는 수요일마다 놀이판이 열린다. 아이들은 그날그날 놀고 싶은 놀이를 찾아내고 “비석치기 하자” “무뽑기 하자”며 다른 친구들을 끌어들인다. 몸이 불편한 친구가 고무줄을 뛸 동안 발을 잡아주고 가르쳐주기도 한다. 같이 놀려다 보니 터득한 상호부조다. 놀이와 노래 연구모임 ‘놀래?!’에서 활동하는 김리경씨도 말한다. “노는 맛을 아는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놀거리를 찾아내요. 놀지 못했던 아이들은 ‘이제 뭐해요? 놀아도 돼요?’ 하고 물어봐요. 항상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니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게 된 거죠. 내가 없어진 거고, 사는 게 재미가 없겠죠.” 신나게 뛰어놀다가 개운하게 땀 흘리는 재미를 모른다. 정교한 장난감에만 의존해서 논다. 앉아서 (대근육이 아닌) 소근육만 키우면서도 놀고 있다고 믿는다. “놀잇감을 찾고 만드는 것도 놀이예요. 돌이나 나뭇가지처럼 자연에서 찾은 놀잇감으로 쌓아올리기를 하면 모두 다르니까 서로 비교를 안 해도 되잖아요. 레고 같은 블록으로 쌓아올리기를 하면 저도 모르게 누가 더 웅장하게 쌓아올리나 경쟁하고 평가하게 돼요. 놀이는 나를 표현하는 것인데 아이들은 레고를 닮아가고 있어요.”

놀토 덕분에 부모도 아이도 잘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지난 4월5일 서울의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놀라운 토요일 서울엑스포’에는 10만 명이 다녀갔다. 서울 전역에 있는 청소년수련관 31곳과 특화시설 6곳에서 열리는 주말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홍보하는 행사였다. 프로그램 수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2011년엔 121개 주말 프로그램이 운영된 데 비해 올해는 1114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우수 토요 프로그램으로 뽑힌 ‘비행 시뮬레이션 체험’에서는 비행교육을 받는다. 참가비도 없고 저소득층 어린이가 우선 참가할 수 있다. 화곡청소년수련관에서 하는 ‘서울 성곽 트레킹’도 인기다. 성곽 전문가들을 따라 온 가족이 서울 5개 성곽을 돈다.

어린이 놀이 프로그램의 진화

해마다 5월이면 찾아오는 어린이 책잔치에서도 놀이 프로그램의 진화가 눈에 띈다. 한국에서는 책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어린이 놀이 프로그램이 잘되기 어렵기 때문에 규모로 보나 찾아드는 사람 수로 보나 가장 큰 어린이 놀이터인 셈이다. 게다가 이번 어린이날에는 경기도 파주의 출판도시와 서울 홍익대 앞에서 큰 책잔치가 동시에 열린다. 올해 처음 열리는 ‘와우어린이북 페스티벌’ 기간인 5월4일부터 6일까지 3일 동안 홍대 앞 주차장 거리가 바뀐다. 39개 어린이책 출판사와 서점들이 주차장에 부스를 차려 독자들을 만나는 동시에 갤러리와 복합문화공간 등에서는 작가 62명이 참여해 55개 어린이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연다. 축제 기간에 아이들은 동화 <구름빵>에 나온 주인공들의 가면을 쓰고 홍대 앞 거리를 쏘다닌다. ‘와우 어린이북 페스티벌’ 이채관 대표는 “문화적 다양성은 풍부하지만 유흥지대라는 의미가 강했던 홍대 거리를 어린이 놀이터로 만든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홍대 앞에서 열리는 행사답게 어린이 놀이에서도 실험적인 시도가 엿보인다. 주차장 거리에 모인 ‘도란도란 책마을’ 한쪽에는 페이퍼아트 작가 문건호가 ‘미래를 여는 큐브’를 설치한다. 가로·세로 2m 크기의 큐브에서는 책과 함께 애니메이션 등 영상자료를 설치하고, 라디오 공개방송을 진행하거나 그림자 인형극을 한다. 보는 예술에서 하는 예술, 참여형 예술 놀이가 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어린이 프로그램의 특징이다. 5월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서교예술실험센터 지하 1층에서 열리는 <사라진 책을 찾아서>는 극과 노래, 영상, 관객 참여가 결합된 퍼포먼스 공연이다.

올해로 10년을 맞은 파주 출판도시의 ‘와글바글 어린이 책잔치’에선 어른들의 놀이와 아이들의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가 선보인다. 5월3일부터 6일까지 열리는 축제 기간에 출판도시 안에 있는 250개 출판사들이 각 사옥에서 다양한 문화행사와 체험행사를 한다. 5월5∼6일 청아출판사 2층에서 열리는 요그스튜디오의 ‘촉각 애니메이션 워크숍’은 어른과 아이가 감각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놀이다. 사람들은 눈을 가리고 더듬고 만지며 세상을 다시 느껴본다. 어른들이 세상을 더 많이 봤다고 아이들보다 나은 체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사물에 물감을 묻혀서 판화처럼 찍어내기도 한다. 이 놀이를 주도하는 김영근 감독은 “아이들은 감수성이 열려 있어서 자유롭게 노는 반면, 어른들은 손끝으로 세상을 느끼면 충격을 받는다. 어른들은 잘 안 하려고 하지만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보리출판사의 ‘보리 책놀이터’에선 창작집단 ‘도르리’가 아이들과 함께 벽화를 그린다. 평화에 관해 아이들이 작은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고 벽을 장식한다. 같은 주제로 어른과 아이가 머리를 맞대는 식이다.

책잔치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책만들기 놀이도 달라졌다. 축제 기간 중에 열리는 ‘책 만들며 크는 학교’에선 아이들이 책의 모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새로 써본다. 완성도가 떨어져도 상관없다. ‘나무’라는 주제어를 주면 아이들이 아줌마 파마머리, 사람의 뇌 구조, 화산 폭발 등 마음대로 연상하고 4쪽짜리 책에 내키는 대로 쓰고 그리는 방식이다. 예쁜 모양의 책, 기발한 책 만들기에서 책의 근원인 이야기와 주제로 문제의식이 되돌아간 셈이다. ‘책 만들며 크는 학교’ 권성자 대표는 “놀이는 자신을 비우고 드러내는 것인데, 부모들은 자꾸 놀 때도 뭔가를 주입하려고 한다. 속으로는 찌꺼기만 쌓이고 겉으로는 흘러넘치는 꼴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가 뭘 하면 해방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지경이다”라고 걱정했다.

이웃과 함께 뛰고 구르며 놀자

몸으로 노는 것은 지금 세계적인 트렌드다. 독일에서는 국립공원의 일부를 헐어 청소년 체험시설로 바꿨다. 백석대 청소년전공 박철웅 교수는 “숲을 중시하는 독일에선 놀라운 결단이다. 놀이로, 그것도 몸으로 노는 것이 한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고 말했다. 실내 교육시설도 놀이시설로 바꿨단다. 2006년 문을 연 ‘클레터파크 카뇬 코르바일러’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아동을 위한 실내 암벽등반 시설이다. 암벽을 오르고 서커스, 복싱, 댄스를 하며 사회와 마주할 자신감을 얻는 곳이다.

잘 노는 아이들은 관계맺기의 즐거움을 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마을 극장에선 어린이날 다음날 동네 주민들이 모여 봄소풍을 떠난다. 성미산 극장에서 가족마당극 <나무꾼과 선녀>를 본 뒤 성미산에 올라가, 사방치기·고무줄·실놀이를 하며 신나게 노는 것이다. 어린이날에 서울 양천 생활협동조합에서는 ‘가족 명랑운동회’를 연다. 지난해에도 100여 명이 왔다. 참여한 가족들은 동네에서 어른과 아이가 한데 모여 단순한 놀이를 하는 것이 이리 즐거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처음에는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초등 고학년도 막판에는 승부에 열을 내고 강강술래를 하며 뛰어다녔단다. 놀이와 노래 연구모임 ‘놀래?!’는 ‘동네책방’ 말고도 경기도 과천의 무지개 교육마을과 분당 창조학교, 평택 오성초등학교를 돌며 일주일에 한 번씩 놀이판을 벌인다. 나중에 놀이치료를 하지 말고 매일매일 잘 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부모들 덕분이다. “놀다 보면 ‘나’만 있던 아이들 마음속에 ‘우리’가 생겨요. 컴퓨터 만지는 것보다 ‘우리 뭐할래?’ 묻는 게 좋아진대요.” ‘놀래?!’의 김리경씨의 말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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