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안상학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은
그 얼굴 말고는 다른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늘 그 얼굴에 그 얼굴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떄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은 어떤 나비가 와도 그 얼굴에 그 얼굴
나무는 어떤 새가 앉아도 그 얼굴에 그 얼굴
어쩔 때 나는 속없는 얼굴을 굴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과장된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
진짜 내 얼굴은 껍질 속에 뼈처럼 숨겨두기 일쑤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도
그저 별다른 얼굴 없다는 듯
늘 그렇고 그런 얼굴로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
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
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
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있는
나무의 얼굴에 눈독을 들이며
제 얼굴로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며칠 전,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꾸 불편해하며 어색한 표정으로 힘들어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순간 속상했다. 제법 닳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몸과 마음의 낯을 가리는 내가 마음에 안 든 것이다. 이런 내가 싫으니 자꾸 숨기려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고, 웃기게도 이 모습 또한 맘에 안 들어하고.. 어쩌라는 건지. 답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잘 관찰하고 인정하는 건데 쉽지가 않다. 다행히 이럴 땐 나를 돌아보는데 힘을 주는 아이의 얼굴이 있다. 아이는 놀때나, 잘 떄나, 울때나, 웃을 때나, 먹을 때나... 제 얼굴로 산다. 숨기는 것 없이 늘 그 얼굴에 그 얼굴로 살아간다. 마알갛고 깨끗한 아이 얼굴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고, 잊고 있던 내 얼굴로 사는 법을 하나씩 천천히 배워나갈 용기가 생긴다. 오늘도 쪼그리고 앉아 아이 얼굴에 눈독을 들이며 내 얼굴로 사는 법을 배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