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큰 사고가 일어나면 그에 비해 언론의 집중을 덜 받는 문제들이 소리없이 묻히고 만다.
내 밥벌이, 내 가족이 있어 일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이기에 언론에서조차 묻어버리고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보면 세월호 얘기도 금방 우리 사이에서 식어버리고 만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동안의 여러 참사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나는 세월호 사고가 있기 전, 다른 문제들로 인해 이미 속이 많이 상해 있었다. 시작한 지 오래됐지만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싸움들--쌍용차, 밀양, 강정, 장애등급 철폐, 장애인 이동권 보장 문제, 안녕들 대자보 등-- 속에서 지쳐가는 사람들의 소식을 보면서 그랬다. 반지하방에 살던 한 가족이 '월세를 못 내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보면서는 결혼 전 나와 내 동생, 부모님이 살던 서울의 작은 지하 월세방을 떠올렸다. 그마저도 유지할 수 없어 뿔뿔이 흩어진, 그래서 공장 구석에서, 요양원 방 한칸에서 지내고 있는 내 부모를 생각하면 그 일을 '남의 일'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미묘한 차이로 갈리는 장애등급과 기초수급권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놓이는 사람들, 휠체어 탄 몸으로는 어느 곳도 쉽게 다닐 수 없는 사람들 얘기를 만나면 다리 불편한 내 아이의 미래가 그려져 속이 문드러졌다.
'유학생 가족'이라는 모호한 신분으로 미국에 살면서도 한, 미 양국의 사회 문제(구체적으로는 양국의 사회/경제적 약자 문제)에 제법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이런저런 속상한 소식을 이제 그냥 '관심'의 차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5년 넘게 써오던 개인 블로그에서 한 발 더 나와 베이비트리에 공개글을 써보기 시작한 것도, 친교 유지용으로 열어만 놓고 있던 페이스북에 이 생각 저 생각을 짧은 영어로 남겨보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 특별히 가진 것은 없지만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사회 문제에 나서서 뭔가 해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크니 글로 꾸준히 뭔가를 해 보고 싶단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월호 사고가 났고, 기가 많이 꺾였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그 직후부터 아이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감기에, KT 신드롬 때문에 생기는 발바닥 통증에, 탈장 증상에, 오른쪽 배에는 역시 신드롬 때문에 생기는, 원인 모를 혹이 불룩 솟아 올랐다. 이리저리 동동거리며 열흘 남짓을 보냈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아파하는 아이 곁에서, 밤마다 까만 바다 속에서 울고 있을 아이들과 부모들을 떠올리며 괴로워 했다.
그럼에도 베이비트리에 들어올 때마다 희망을 보았다. 많은 분들의 고민과 목소리에는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할 수 있다는 외침이 들어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이나 비난, 분노를 넘어선 '연대'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앞장서서 외치고 있었다. 이 연대는 비판과 분노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김규항이 지적했듯, 분노는 지속되어야 하고, 이 분노의 힘으로 우리는 '변화'라는 풀코스를 완주해야 한다. Elisabeth님의 지적처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연대를 저지하려는 세력이며, pororo0308님과 윤영희님이 공유하신 것처럼 우리가 나서서 변화를 이뤄내는 데 참여해야 한다.
나는 여기에,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꼭 심어줘야 할 것 한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바로 '공감 능력'이다. 우리의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이 공감능력이다. 갈 곳을 잃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무슨 말을, 무슨 몸짓을 해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이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공감 능력 제로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해서는 안된다. 반지하방, 밀린 월세와 고지서, 차압 딱지, 부모 형제 자매를 잃은 슬픔, 차별, 장애를 가진 아이, 친구 등등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 사람들을 대신해 목소리 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해줘야 한다.
그런데 겁이 난다. 이미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키워왔지 않은가. 3년 반 전, 강사 자리를 구하러 학원에 시범강의를 하러 다니던 나를 기겁하게 만든 그 아이들이 생각난다. '선생님, 쟤는 저보다 못해요' '선생님, 얘 지난 시간에 단어 열 개 중에 세개 밖에 못 맞혔어요, 때려주세요.' '선생님, 저는 맞아도 싸요' '선생님, 저는 잘했으니까 사탕 주세요, 쟤는 안돼요.' 하던, 장난스럽지만 한편으론 섬뜩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은 누구의 자식들일까. 별에서 온 아이들일까? 아니, 그들 모두 우리 아이들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괴물과도 같은 우리 자신,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채 제 스펙, 제 안위에만 신경쓰는 우리 자신이며, 그런 우리가 낳은 또다른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