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벌초 인파에 묻혀
밤 아홉시가 다 돼서야 도착한 우리의 짐풀기는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거실에 널부러져 있던 들을 풀어헤치고
각 방으로 배치하는 일을 거의 끝냈을 무렵,
"어이구 축하드립니다."
광주에 사는 집주인 아저씨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극구 점심도 할 겸 동네 구경을 시켜준다고 해서 눈꼽만 겨우 떼고 집을 나섰는데,
헉, 식당에 도착해 보니 마침 벌초를 마친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모여있는 겁니다!
"이분들이 그 작가들이시구만!"
"어이구 작가라니요, 이제 막 출판사를 차렸습니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가는 곳마다 젊은 작가부부가 왔다고 난리입니다.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호칭만 갖다 쓰고 있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그나저나 작가는 그저 글만 잘 쓰면 되는 것이 아니더구만.
요새는 PR이 중요허요"
"담양에 글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다던디 가봤는가?"
"우리 동네는 마을에서 상수도를 관리하는 상수도 보호구역이라 강원도보다 더 물이 좋소."
"근디 여기까지 어떻게들 왔는가?"
"아무튼지간에 잘 왔소. 하느 일 잘 되길 바라겄소."
식당 앞에 모여 계신 분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느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데 십오분은 걸린 것 같습니다.
아, 이렇게들 뵐 줄 알았으면 얼굴에 뭐라도 좀 바르고 나오는 건데.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 동네 농협의 지점장이기도 했던 주인아저씨와
농협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한 뒤 거실과 주방을 치우고 있을무렵
친정 부모님과 동생네 가족이 깜짝 방문을 했습니다.
마침 시어머니도 같이 있었겠다,
광주에 계신 시아버지도 불러 다같이 앞마당 모여 앉아 저녁을 먹었습니다.
새 집은 시댁인 광주에서 40분, 친정인 전주에서 1시간이 걸립니다.
남편이 서울 아파트에서 공들여 키운 고수도 인기 만점입니다.
어느 캠핑장보다도 좋다고들 하시니 더 기분이 좋습니다.
양주와 소주와 와인을 거의 다 비워갈 무렵
근방에 산다는, 남편으로 치면 할아버지 뻘이라는(대부라고 부릅디다) 분이
퇴근길 들렀다며 화장지를 사들고 오셔서 놀랐습니다.
연고가 전혀 없는 마을인데도 희귀한 편에 속하는
남편의 성씨(고무래 정) 일가가 몇분 계시는 통에
내가 정씨집안 며느리였지, 새삼 각인하는 중입니다.
그 분과 함께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전 날 식당에서 만났던 한 할아버지께서 오셨습니다.
다른 마을에 사시는 분인데, 우리가 천주교 신자인 것이 반가워 예까지 일부러 오셨답니다.
역시 놀랍고 기뻤습니다.
광주에서 어머님이 통팥 시루떡 세 박스 반을 해오셨고
지난 밤 인사를 나눈 대부님과 마을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우리집 근처 집들부터 농협, 면사무소, 우체국, 보건소, 그리고 어르신들이 계신 복지회관까지.
<숙이 미용실>언니 이름은 어쩌면...
저와 같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두들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궁금해 하십니다.
그날 오후 화순이 고향이신 시아버지와 친구 두 분께 닭백숙을 대접했습니다.
전입신고를 했고 농협에 새 계좌를 만들었고, 인터넷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이사한 뒤 사흘만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사온 곳은 전남 화순군의 한 면소재지입니다.
소재지긴 하지만 거주인구는 몇 안 되는 무척 작은 동네입니다.
걸어서 3분 안에 농협, 우체국, 면사무소까지 갈 수 있고요.
집 바로 옆의 농협은 동네 사람들이 오다가다 들려 커피를 뽑아 마시는 셀프 카페이고,
방앗간이 있고 유명한 화순 막걸리를 제조하는 집도 있는 마을입니다.
미용실도 두 군데나 있고 겉에서 보면 음식점인 줄 전혀 모르겠는, 작고 붐비는 식당도 발견했습니다.
우리집은 어느 방에서든, 부엌에서든 하늘과 산이 보입니다.
앞마당엔 잔디가 깔려 있고 뒷마당에는 동물 우리, 그 너머로 꽤 넓은 텃밭이 있습니다.
오후 다섯시 즈음이면 변성기의 중학생들이 소란스럽게 재잘거리며
우리집 앞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갑니다.
농협이 문을 닫는 여섯시 이후면 사방이 고요해 집니다.
경운기 시동 소리에 잠을 깨고 쏟아질 듯한 별들을 바라보며 잠이 드는 날들.
베란다가 아닌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집게로 고정시키고
오후에 집게와 빨래를 다시 걷는 일도 벅차게 느껴지는데
보살펴야 할 것들 투성이인 이 곳에 봄이 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무척 궁금합니다.
급한 성미 덕분에 짐정리도 삼일 째 되던 날 끝냈고요.
추석까진 적응기간으로 삼은 만큼 원고 수정일은 잠시 접어두려고 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약속된 일,
알라딘 신간평가단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를 읽고 있습니다.
반면 남편은 무척 바쁩니다.
이사 전부터 각종 DIY와 동물관련 카페에 가입을 하더니
이사온 직후 사들인 공구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설레는 표정으로 택배 아저씨를 기다리고
조심스럽게 박스를 풀어헤치는 그를 볼 때마다
서울에 살던 삼촌이 사가지고 오는 종합선물세트 과자 더미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제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추석이 금방이네요.
워낙 대문이 무의미한 곳이라 언제 어느때고 예고 없이 오시는 통에
저녁마다 문단속을 단단히 하며 도시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이것도 곧 달라지겠지요.
그렇게 불쑥불쑥 방문하신 동네분들이 선물해 주신 화장지들입니다.
유일한 가게인 농협 하나로마트의 화장지 코너가 텅 비었을 것 같군요.
특히 저 스파크는 사연이 좀 있어요.
이미 한 번 선물로 들어온 것을 쓰레기 봉투와 커피로 바꿔왔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또 들어온 겁니다 ㅋㅋㅋ
그래서 고민을 했어요. 또 바꿔? 말어?
그래도 안 쓰는 것을 쟁여둘 순 없어서 다시 쓰레기봉투와 과자로 바꿔왔답니다.
부디 이 모든 사연(사들고 간 사람들, 족족 바꾸러 오는 나)을 다 아는 직원이
입이 무겁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아무튼 이사하기 전전날부터 기침, 목감기를 앓고 있는 준영이만 빼면
모든 것이 수월한 날들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보니 이것도 만만치 않게 깁니다만^^)
이사 잘 와서 잘 적응중이라는 인사를 드립니다.
내 첫 책의 주인공, 호주를 닮은 이곳에서 무척 행복하다는 것도,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문득문득 도시에 두고온 당신들이 그립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