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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탄강 마리보족 사람들의 환영 공연. ‘게’ 역을 맡은 소년은 한국인 방문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esc] 여행
한국과 필리핀의 활동가들이 만나 새로운 여행방식을 탐색한 보홀 지역 탐방기

필리핀 마닐라에서 약 700㎞ 떨어진 보홀은 70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이 나라에서 열번째로 큰 섬이다. 최근 필리핀을 휩쓸고 간 거대 태풍의 영향권에서는 벗어났지만 지난달 큰 지진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지역이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은 필리핀의 새로운 휴양지로 눈길을 끌었다. 지난 9월 말, 20~50대 한국인 여성 활동가 17명은 이곳을 찾아 4박6일 동안 에너지 가득한 여행을 했다. 그곳의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어가는 프로그램으로, 교보생명이 후원하고 한국여성재단이 마련한 2013년 여성 공익단체 역량강화지원사업 ‘짧은 여행, 긴 호흡 여성 활동가 비전여행’이었다. 여행 일정은 공정여행 사회적 기업인 트래블러스맵이 현지 인솔을 맡아 무척 역동적으로 진행했다. 참석자들은 낮에는 공정여행 체험으로 힘을 받고, 밤에는 새로운 사업 기획에 대한 ‘열정 토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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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밀라칸섬 주민들이 모는 돌고래 탐방용 배.

한국과 필리핀 양국 공정여행의 만남

길이 7㎞에 이르는 보홀의 아바탄강은 몇년 전부터 ‘아바탄강 생활 여행’(아바탄 라이프 투어)이란 프로그램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강나루에 들어서자 아바탄 강가 부족 여자아이들이 연기를 피운 그릇을 들고 나타나 악귀를 물리치는 의례를 해줬다. 이 현지 문화 여행은 아바탄 강가의 빈곤한 원주민들을 도우려고 1985년 창립한 시민단체 ‘프로세스 보홀’이 기획을 맡고 있다. 총괄책임자 에밀리아 로슬린다(55)는 “가난에 시달리던 마을 사람들이 관광 수익금으로 강과 숲을 보호하고 이익을 분배하면서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밤에 맹그로브 나무숲을 뒤덮어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반딧불이 여행’이 유명하다. 칠흑 같은 밤을 뚫고 강 위를 달리다 보면 여러 빛깔의 반딧불이 큰 나무에 달라붙어 은은하면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광경이 펼쳐진다. 아바탄강 여행의 진가는 낮에 비로소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보트를 타고 맹그로브 숲이 우거진 강변을 따라 5군데의 마을에 들러 전통문화와 음식을 맛보는 체험 코스다. 밤과 달리 우거진 밀림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너노라면 다리 위에서 부족민들이 꽃잎을 뿌려 일행을 맞는다. 각 마을은 서로 다른 무용극과 따뜻한 의례로 손님들을 환대했는데, 특히 오래전부터 게사냥을 해왔다는 ‘마리보족’ 마을은 주민들이 게잡이에 대한 해학적인 무용극을 보여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관광지 특유의 불편하고 치열한 호객이 없는 건 물론이고, 강 전체 부족 문화를 한편의 뮤지컬로 보는 것처럼 다채롭다.

가난에 시달리던 마을 사람들이 
관광 수익금으로 강과 숲을 보호하고 
이익을 분배하면서 
지역공동체를 활성화 
여행을 통해 피해지역민들 
도울 수 있기를

보홀 근처 파밀라칸섬은 돌고래 탐방으로 유명하다. 보홀에서 방카선을 타고 40분쯤(배 시간은 그날그날 바다 사정에 따라 다르다) 걸리는 거리다. 섬은 오래전부터 고래잡이로 유명했지만 1980년대 포경이 금지되면서 정부와 시민단체들의 협의 끝에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인솔자 트래블러스맵의 황진선(28)씨는 “모터보트의 소음이 돌고래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거리를 유지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은 특히 파도가 높아 선장이 애간장을 태웠지만 오랜 시간 배를 타면서도 날치 몇마리만 반짝하고 뛰어올랐을 뿐, 고래 지느러미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저기 좀 봐!” 선장이 소리치며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고래가 멀리서 온 활동가들에게 마치 선물이라도 주는 양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가장 기뻐한 건 마음을 졸이며 그 모습을 기다렸던 파밀라칸 선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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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아 센터 앞에서 한국인 여성활동가들이 자세를 잡았다.

잡초처럼 살아가는 필리핀 여성들

보홀에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숙박지가 있다. 한국에서 20여년 동안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해온 유진 도코이(52) 신부가 필리핀 귀환 노동자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지원하려고 만든 ‘갈릴레아 센터’다. 한국의 뜻있는 사람들과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만든 이곳은 소박한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 넓은 정원과 노을을 즐길 수 있는 조용한 풍광이 꽤 인상적이다. 관광지의 번다함과 매연에서 벗어나 태평양 시골 마을의 호젓함과 편안함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쉼터다.

신부가 입는 로만 칼라를 벗어두고 티셔츠 차림에 군용 지프를 개조한 버스 ‘지프니’를 즐겨 타고 다니는 도코이 신부는 “보홀은 다른 도시에 견줘 매연과 공해가 덜하며 아름다운 풍광들이 잘 유지되고 있으니 좀더 많은 한국인들이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커뮤니티센터의 매니저 리아 심바혼(43) 또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필리핀으로 돌아간 여성이다. 그는 “좀더 열심히 교육을 받아서 전문적인 여행가이드와 매니저로 성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홀에서 페리선으로 1시간40분 정도 걸리는 세부에는 또다른 이색 장소인 공정무역숍이 있다. 조개껍질과 나무를 엮어 만든 액세서리, 코코넛 껍질 모자, 코코넛이나 망고 열매로 만든 음료며 과자까지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만물상’ 같다. 이곳을 운영하는 에스피에프티시(SPFTC·서던 파트너스 앤드 페어 트레이드 코퍼레이션)는 1996년 설립한 필리핀 첫 공정무역 단체로, 농어민단체와 여성 빈민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의 ‘2013 세계 성 격차 보고서’를 보면, 필리핀은 한국보다 성평등 순위가 106계단이나 더 높지만 여성의 성 착취나 노동 착취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체의 총괄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제럴딘 라브라도레스(52)는 “우리는 그동안 1570여가구 9428명의 사람들을 엮으며 활동해왔고 성평등 운동도 벌인다. 여성은 사회에서 ‘두번째 성별(젠더)’이기 때문에 모두가 힘을 합쳐야 그 존엄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 재활용 천가방을 납품하는 ‘팅고브 여성회’(팅고브 위민스 어소시에이션) 회원들은 한국 활동가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모아 간 헌옷들을 선물받고 “연대에 감사하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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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공정무역가게 에스피에프티시에서는 다양한 망고 제품을 판다.

필리핀의 아픔과 희망

어딜 가나 밝고 긍정적인 얼굴을 만날 수 있는 필리핀이지만, 최근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난달 보홀과 세부에서 규모 7.2의 강진에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보홀 지역에서도 일행이 찾았던 16세기 건물 산토니뇨(어린 예수) 성당을 비롯해 아바탄강 일부 부족이 피해를 봤다. 특히 성폭력·가정폭력 피해 여성 아동들이 머무는 쉼터인 ‘보홀긴급구조센터’(보홀 크라이시스 인터벤션 센터)는 건물이 파손되고 날로 뛰는 물가 속에서 더욱 긴장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을 맞게 됐다. 이에 한국여성재단은 11월 2주 동안 긴급모금 캠페인을 전개해 지원금을 전달했다. 재단 관계자는 “불과 얼마 전 한국의 도움으로 교복을 갖추게 됐다며 기쁜 소식을 전해온 친구들이 큰 고통을 당했다. 필리핀과 아시아의 이웃들이 하루빨리 재난 상황을 극복하고 본래의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giving.womenfund.or.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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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귀환 노동자들을 위한 갈릴레아 센터 푯말

보홀 세부/글·사진 이유진 기자 frog@


(*한겨레신문 2013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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