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종합병원이 아닌 산부인과 전문병원이었으므로 조산기가 있는 산모가 버티기할 수 있는 병실이 없었던 것이다.
출산장면을 동영상으로 담아주고 주물로 만든 아기 발도장 만들어주고 모유수유와 산후 우울증 예방에 대해 강의하고....
서울에 사는 많은 산모들이 선호한다는 럭셔리한 시스템을 갖춘 곳이었지만 이 모두가 지극히 정상적인 출산을 하는 산모를 위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나와 같이 난산을 겪는 산모들에겐 어려움이 많은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병실이 아닌 분만대기실 한켠에 입원해 임신 8개월에 아이가 잘못되어 사산아를 낳아야 하는 옆 침대 산모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근 1주일을 버티고 있었다.
옆 산모와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여자로 태어나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 그 산모와 나... 우리가 너무 불쌍했다.
25주+1일 되는 날 자정쯤 아이를 낳았다.
곧 죽을거 같이 살려달라는 나를 가운데 두고 서너명의 의사가 산소호흡기가 장착된 인큐베이트가 있는 병원을 물색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댔던 것이다.
2003년 서울시내엔 그 인큐베이트가 큰큰병원(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종합병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나를 받아줄 병원은 없었던 것이다. 너무 고가의 의료기였으므로...
갑자기 간호사가 다가와 "아이 낳겠습니다.."며 좀 넓은 엘리베이터 속 같이 생긴 곳(분만실)에 내가 누운 침대를 밀고가 맥도날드 시술한 것을 풀었고 나는 소변보듯 스르르 아이를 낳았다.
"응아~~~"
"별아~ 미안해.. 힘 내..."
세상과 만나 힘겹게 울음을 내뱉는 아기에게 엄마로서 답을 했다. 못난 엄마로서...
뒷수습이 어떻게 됐는지, 정신이 혼미했고 새벽녘 남편과 가족들을 만나 들은 얘기로는 내가 있던 J병원과 서울, 경기도 병원 중 내 아기가 들어갈 그 인큐베이트가 없었다고 한다.
임신 25주가 지나면 유산이 아니라 사망처리 되므로 사산아가 아닌이상 아이가 태어나면 의사는 생명을 살려야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아 추후 보완하겠습니다)
며칠을 더 인큐베이트에 있어야 했던 남자아기(소아과 샘이 알려준)가 자기가 있던 인큐베이터를 내주어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그곳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남자아기에게 감사해 하고 있다.
아침이 되어 아기를 보러 갔다.
소아과 의사샘은 남편과 긴 상담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기가 많이 작게 태어났네요..."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줌마 샘은 조심스럽게 나를 위로하며 눈물에도 많은 세균이 있으니 울지 말라는 얘기도 하셨다.
몸무게 890g...
아이와 만났다. 인큐베이트가 온통 랩으로 싸여 있었다.(양수에 불은 아기의 몸무게를 최대한 유지하려는 것. 아이에게는 1g도 중요했기에)
너무 작은 공주님이었다. 어릴때부터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딸을 보는걸로 이뤄졌다.
반갑고 기뻤다.
아기는 마치 알에서 금방 부화한 새처럼 피부는 투명하고 빨갰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아기가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딸을 얻은 기쁨도 잠시 눈물이 하염없어 흘렀다. 함께 갔던 손위 동서가 나를 안고 나왔다.
병실 침대에 누웠다.
산부인과 담당의가 회진하러 오는 것을 거부했다.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TV나 잡지 신문 어디에서도 미숙아에 대해 본 기억이 없었다. 저렇게 작은 아이도 본 적이 없다.
훗날 들은 얘기로 소아과 의사샘과 상담한 남편은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장애아가 될 확률이 70%이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고 많단다. 집과 회사의 위치, 가족사항 등 세세한 상담까지 받은 모양이다. 비상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까지...
건강한 아기를 낳아 가족들에게 축하 받으며 퇴원하는 같은 병실 다른 산모들을 보며 나는 만 이틀을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계속 잠을 잤던 거 같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내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의 일이었다. 내가 넘어야 할 산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답이 없었다.
생명을 다루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신 분께 기도하는 일밖에...
(3편에서 계속)
종합병원이 아닌 산부인과 전문병원이었으므로 조산기가 있는 산모가 버티기할 수 있는 병실이 없었던 것이다.
출산장면을 동영상으로 담아주고 주물로 만든 아기 발도장 만들어주고 모유수유와 산후 우울증 예방에 대해 강의하고....
서울에 사는 많은 산모들이 선호한다는 럭셔리한 시스템을 갖춘 곳이었지만 이 모두가 지극히 정상적인 출산을 하는 산모를 위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나와 같이 난산을 겪는 산모들에겐 어려움이 많은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병실이 아닌 분만대기실 한켠에 입원해 임신 8개월에 아이가 잘못되어 사산아를 낳아야 하는 옆 침대 산모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근 1주일을 버티고 있었다.
옆 산모와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여자로 태어나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 그 산모와 나... 우리가 너무 불쌍했다.
25주+1일 되는 날 자정쯤 아이를 낳았다.
곧 죽을거 같이 살려달라는 나를 가운데 두고 서너명의 의사가 산소호흡기가 장착된 인큐베이트가 있는 병원을 물색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댔던 것이다.
2003년 서울시내엔 그 인큐베이트가 큰큰병원(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종합병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나를 받아줄 병원은 없었던 것이다. 너무 고가의 의료기였으므로...
갑자기 간호사가 다가와 "아이 낳겠습니다.."며 좀 넓은 엘리베이터 속 같이 생긴 곳(분만실)에 내가 누운 침대를 밀고가 맥도날드 시술한 것을 풀었고 나는 소변보듯 스르르 아이를 낳았다.
"응아~~~"
"별아~ 미안해.. 힘 내..."
세상과 만나 힘겹게 울음을 내뱉는 아기에게 엄마로서 답을 했다. 못난 엄마로서...
뒷수습이 어떻게 됐는지, 정신이 혼미했고 새벽녘 남편과 가족들을 만나 들은 얘기로는 내가 있던 J병원과 서울, 경기도 병원 중 내 아기가 들어갈 그 인큐베이트가 없었다고 한다.
임신 25주가 지나면 유산이 아니라 사망처리 되므로 사산아가 아닌이상 아이가 태어나면 의사는 생명을 살려야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아 추후 보완하겠습니다)
며칠을 더 인큐베이트에 있어야 했던 남자아기(소아과 샘이 알려준)가 자기가 있던 인큐베이터를 내주어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그곳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남자아기에게 감사해 하고 있다.
아침이 되어 아기를 보러 갔다.
소아과 의사샘은 남편과 긴 상담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기가 많이 작게 태어났네요..."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줌마 샘은 조심스럽게 나를 위로하며 눈물에도 많은 세균이 있으니 울지 말라는 얘기도 하셨다.
몸무게 890g...
아이와 만났다. 인큐베이트가 온통 랩으로 싸여 있었다.(양수에 불은 아기의 몸무게를 최대한 유지하려는 것. 아이에게는 1g도 중요했기에)
너무 작은 공주님이었다. 어릴때부터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딸을 보는걸로 이뤄졌다.
반갑고 기뻤다.
아기는 마치 알에서 금방 부화한 새처럼 피부는 투명하고 빨갰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아기가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딸을 얻은 기쁨도 잠시 눈물이 하염없어 흘렀다. 함께 갔던 손위 동서가 나를 안고 나왔다.
병실 침대에 누웠다.
산부인과 담당의가 회진하러 오는 것을 거부했다.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TV나 잡지 신문 어디에서도 미숙아에 대해 본 기억이 없었다. 저렇게 작은 아이도 본 적이 없다.
훗날 들은 얘기로 소아과 의사샘과 상담한 남편은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장애아가 될 확률이 70%이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고 많단다. 집과 회사의 위치, 가족사항 등 세세한 상담까지 받은 모양이다. 비상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까지...
건강한 아기를 낳아 가족들에게 축하 받으며 퇴원하는 같은 병실 다른 산모들을 보며 나는 만 이틀을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계속 잠을 잤던 거 같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내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의 일이었다. 내가 넘어야 할 산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답이 없었다.
생명을 다루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신 분께 기도하는 일밖에...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