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 조회수 3205 추천수 0 2015.04.05 21:02:02

3월 중순이 지나면서 생활이 바빠졌다.

작년부터 듣고 있는 수업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두 아이 학교, 유치원에 보내고 부랴부랴 9시까지 실습기관으로 나간다.

노인요양기관에서 진행되는 실습이라 어르신들과 일과를 보낸다.

내년이면 100세가 되는 최고령 어르신을 비롯하여

90세 이상 어르신들도 다섯분이 넘는다.

어르신들 평균 연령이 80세 중반이다.

치매가 있는 어르신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지만

흘러간 노래를 따라 부르시고 종이접기를 배우실 정도로 정정해 보인다.

나이 많으신 어르신을 직접 모셔본 경험이 없어

처음에 낯설기도 했지만

몇 주 지나니 한 분 한 분이 친근하고 애틋하게 다가왔다.

아흔이 넘으셔서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검버섯이 여기 저기 피었지만

간식을 드리거나 도와드릴 때면

'감사해요'라며 밝게 미소지으며 두손을 꼬옥 잡아주시는

어르신이 왜그리 예뻐보이는지 모르겠다.

멀리서 이리 와보라며 손짓하셔서 가보면

슬그머니 사탕을 손에 쥐어주시고 

중국에서 태어나셨다는 어르신은 중국어, 일본어를 술술 하신다.

어릴 적 관가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는 어르신,

전쟁이 일어나 피난 떠날 때 옷장에 곱게 한복을 개켜놓고 그냥 왔다고,

피난 갈 때 한강 다리가 코 앞에서 끊어졌다며,

위안부로 가는 언니들이 짐칸에 실려가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어르신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생생한 근현대사였다.

해방과 전쟁 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어르신들이었다.

 

아마 집에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하루 종일 모신다면

자식이라 할지라도 힘들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해서,

그래도 하루종일 꼬박 옆에 계시는 건 아니라서

어르신들을 대하는 게 덜 힘든 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어르신들 옆에서 지내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늙어갈까 생각하는 시간도 잦아졌다.

실습을 시작하고부터 길가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이

왠지 다르게 보였다.

어르신들을 알아가면서 마을의 소중함도 커졌다.

마을에서 남녀노소 서로 알고 인사나누던 시절엔

그래도 덜 외롭지 않았을까.

갑자기 김춘수의 '꽃' 이란 시가 읽고 싶어진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우리가 사는 곳이 좀 더 열려있는 마을이 된다면

우리 아이들은 좀 더 안전하고

어르신들에게는 이야기동무가 더 많아지고

아이 키우는 엄마들도 덜 힘들지 않을까.

독거사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겠지.  

올 봄에 많은 어르신들이 내게 꽃으로 다가왔다.

벌써 어르신들과 헤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이 걱정둥이를 어쩌누.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668 [책읽는부모] (이벤트 응모-책읽는 부모) 동생 낳아줘서 고맙습니다. imagefile [5] yangnaudo 2015-12-21 3238
667 [호주와 나]를 읽고 -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2] 윤영희 2014-02-22 3238
666 [가족] 아인 엄마, 수고했어! image [1] 베이비트리 2013-07-01 3236
665 [자유글] 캠프를 즐겨다오 [7] 분홍구름 2013-12-30 3234
664 [자유글] 꽃보다 더 향기로운 이 봄꽃 향기 image 베이비트리 2015-04-02 3233
663 [가족] “남자는, 남자는 말야 임마…미안하다 말하는 게 아냐” image 베이비트리 2015-12-07 3231
662 [자유글] 40일간의 여름방학, 얘들아. 엄마 떨고있니..? [2] 윤영희 2014-07-20 3231
661 [자유글] '먹방'용 사과~! imagefile [1] 꿈꾸는식물 2014-01-18 3231
660 [가족] [아내없이 살아가기2] 뽀뇨를 만나다 [1] 홍창욱 2014-03-02 3230
659 [자유글] 너 이래도 되는거냐. [2] 분홍구름 2013-07-18 3229
658 [자유글] [시쓰는엄마] 내 생애 최고의 순간 [2] 난엄마다 2017-03-20 3226
657 [자유글] 서른살공연 난엄마다 2014-12-01 3226
656 [나들이] ‘보물단지’ 백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대로 알차게 즐기기 image 베이비트리 2015-08-20 3225
655 [자유글] ‘빵덕’의 자유를 허하라 image 베이비트리 2015-04-30 3224
654 [가족] 가방끈 긴 학생부부의 ‘2세’를 둘러싼 논쟁 imagefile 베이비트리 2015-07-06 3216
653 [자유글] 해외여행 가기 전 예방접종 등 정보 챙기려면? [1] 양선아 2014-07-10 3216
652 [자유글] 가습기고장..ㅠ [2] gnsl3562 2017-03-14 3214
651 [책읽는부모] 희망의 불꽃-불꽃은 저절로 피어오르지 않는다 날개 2014-08-01 3213
650 [살림] 숲을거닐다 님께 - 스타킹 활용법 imagefile [1] anna8078 2014-10-07 3212
649 [나들이] 의미있는(?) 가족나들이 imagefile 모카휘핑크림 2016-04-20 3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