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022404730_20130208.JPG
가족드라마의 진화

[한겨레 설 특집] 여러분의 안방, 안녕하세요?

인자하거나 엄격한 아버지와 
자식들의 작은 소동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뻔하지만 아름다운 공식

IMF 보릿고개를 지나며 
온갖 욕망과 배신과 분노가 
안방을 점령했다 
막장은 왜 계속되는가 
시청자들은 왜 더 이상 
가정에서 희망을 찾지 않는가

잠시 설을 하루 앞둔 고향 집 저녁 풍경을 상상해 보자. 대처에서 서둘러 내려온 친지들은 일찌감치 인사를 끝냈고, 저녁을 챙겨 먹고 나면 벌써 해가 저 너머로 떨어진 뒤다. 어지간한 안부는 전화로 익히 들어 알고 있고, 결혼이나 취직 이야기가 나오면 피차 즐겁지 않을 게 뻔해 말을 아끼는 어색한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이나 거드는 척 자리를 뜰까 돌아보면 차례상에 올릴 음식들도 준비가 끝났고, 설거지도 얼추 끝나 일어설 핑계도 없는 타이밍. 본격적으로 담요와 화투장을 꺼내기엔 조금 이르고, 그렇다고 그 시골에서 딱히 즐길 만한 여흥도 없는 시간대가 되면 보통 선택지는 하나로 귀결된다. 티브이. 그리고 그렇게 켠 티브이에선 십중팔구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가 흘러나온다. 명절에도 좀처럼 쉬는 법이 없는 이 성실한 장르는 가족을 무대로 불륜, 사기, 배신, 출생의 비밀, 살인, 유기, 복수 등의 사건을 쉬지 않고 그려낸다. 그러니 근 반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단란하게 앉아 수정과를 들이켜며 티브이 속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광경(<백년의 유산>)을 구경하는 것이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일까?

사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탄식하는 것조차 새삼스럽다. 흔히 ‘막장드라마’라고 부르는 장르가 한국의 안방극장에 침투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를 수놓는 아침드라마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더구나 막장드라마의 흥행은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미국도 <제너럴 호스피털>로 대표되는 유구한 ‘소프오페라’의 전통이 있고, 일본에도 ‘아사도라’(아침드라마), ‘히루메로’(오후멜로극) 시장이 존재한다. 중남미에서 출발해 전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통속극 장르 ‘텔레노벨라’(티브이소설)까지 치면 막장드라마에 대한 수요는 세계적이라 할 만하다. 이유도 간단하다. 자극적인 요소가 많으면 시청자의 눈을 붙잡기 쉬우니까. 우리는 이미 <아내의 유혹>이 몽골에서 시청률 80%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는 것을 보면서 전세계가 막장으로 하나되는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막장은 이미 예전에 우리 앞에 와 있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

한국의 막장드라마 열풍에는 분명한 흐름이 있다. 아침드라마처럼 제한된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저녁 홈드라마의 시간대를 완전히 잠식한 것이다. 한때는 그 시간대가 <서울 뚝배기>나 <자반고등어>,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와 같은 얌전한 홈드라마로 채워지던 때가 있었다. 든든하고도 엄격한 가부장이 있고, 그 밑에 이런저런 소동을 겪는 자식들이 있으며, 잠시 갈등을 겪거나 아옹다옹 다투더라도 결국엔 가부장제 질서 안에 화합해 행복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매우 규범적인 가정을 그리는 얌전하고 행복한 홈드라마.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퇴근한 뒤 저녁 밥상 앞에서 온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며 티브이가 그려내는 ‘바람직한’ 가정상을 감상했다. 2013년의 한국인들은 온갖 범죄와 음모, 협박과 복수가 하필이면 가정을 무대로 펼쳐지는 것을 보며 밥숟갈을 뜬다.

00459473601_20130208.JPG
서울 뚝배기(KBS) 1990.9.3~1991.7.5
이제 한국의 홈드라마에서 가정은 돈 때문에 이혼과 위장결혼을 용인해줘야 하는 고통의 원인이거나(<그래도 당신>), 불륜과 배신, 살인미수가 창궐하는 범죄의 배경이거나(<그대 없인 못살아>), 마음이 가는 연인을 찾아도 상대가 이복남매인지 아닌지 가슴을 졸여야 하는 혼외정사와 출생의 비밀의 무대로 그려진다(<당신뿐이야>). 그리고 이런 갈등은 알고 보니 대기업 회장의 잃어버린 자식이었다거나, 재벌 3세와 연애결혼해서 인생을 역전하거나, 혹은 자신을 괴롭혔던 이가 알고 보니 생명이 위태로운 중병을 앓고 있어서 어영부영 용서를 해주는 식의 외부 개입이 아닌 이상 봉합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쩌다가 홈드라마가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답하려면, 그 뒤에 숨겨진 진짜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한국의 홈드라마는 막장에 잠식당했는가”라는 질문 뒤에 은폐된, “왜 한국의 티브이 시청자들은 더이상 가정에 희망을 두지 않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한국의 홈드라마 장르가 막장과 만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시점과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90년대 초반 에스비에스(SBS)의 개국과 때를 비슷하게 해서 스타 작가로 등극한 서영명 작가의 작품들에서 그 조짐을 볼 수 있다. 일찍이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새 여자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둘이 이복자매였고 본인은 장인과 삼촌-조카 사이였다”는 반전의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1993)나, “여고 동창생 친구가 시아버지와 결혼해 졸지에 시어머니가 되었는데, 내가 가출한 사이 친구의 전남편이 집에 쳐들어와 친구를 끌고 가는 바람에 시아버지는 충격으로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는” 파격의 전개를 자랑하는 <이 여자가 사는 법>(1995)에서 보여준 서영명 작가의 작품세계는 오늘날 다시 보아도 손색이 없는 ‘막장다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막장드라마가 주류적 흐름으로 올라서진 못했다. 시청자들의 반감 또한 지금과 비할 바가 아니었는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영명 작가는 시청자들이 전화로 “나더러 정신병자라며 죽여버리겠다는 험한 말까지 한다”고 토로한 바 있다.(1995년 3월18일, 국민일보 ‘비난 빗발 S­TV <이 여자가…>/작가 서영명 첫 인터뷰’ 중) 시대가 그랬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지존파 사건’이 터지면 대통령이 나서서 티브이 드라마의 폭력성 문제에 대해 지적을 하고, 드라마 <애인>에서 불륜관계인 유동근과 황신혜가 호텔로 가서 동침하는 장면이 나오면 그 장면의 선정성 여부에 대해 국회에서 설전이 오가곤 했다. 티브이는 더 점잔을 빼기를, 모범적이고 규범에 맞는 ‘정상적인’ 관계만을 보여줄 것을 요구받았다.

안전핀을 뽑은 건 90년대 후반 한국을 강타한 아이엠에프 사태였다. 한국의 가정을 지탱했던 건 가부장제였고, 그것은 가장의 경제력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생계와 교육, 복지를 꾸려 나가는 대신 가장에게 절대권력을 쥐여주는 형태로 유지가 되는 질서였다. 그런데 불과 1~2년 사이에 한보, 기아자동차, 쌍용, 대우 등의 거대 재벌들이 무너지고, 시중 금융기관들이 자금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더니, 급기야 외환보유고가 똑 떨어지며 나라가 통으로 망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나라가 망했는데 가장이라고 벌이가 수월했으랴. 실직했다고 집에다 말하지 못해 양복 차림으로 동네 공터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고, 더 상황이 안 좋은 이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느라 잠수를 타야 했다. 목숨을 끊거나 노숙을 택하는 이들이 연일 뉴스 지면을 뒤덮었던 시절, 가장의 경제력과 권위에 기대 지탱되던 가부장제는 그 힘을 잃었다. 그리고 아버지들이 몰락하자, 그간 가장의 권위로 간신히 통제하고 은폐했던 욕망들이 교통정리되지 않은 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혼을 결정하는 데는 부모의 의사보다 본인의 의사, 나아가선 본인의 경제상황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한명이라도 더 돈을 벌면 다행인 경제불황 속에서 “여자는 결혼하면 살림해야” 같은 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부모의 눈치를 보느라 가정불화를 견디고 살던 이들이 이혼을 결단했고, 기존의 학업-취업 루트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장래 진로에 대한 부모 세대의 훈수도 그 힘을 잃었다. 가족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폭탄 돌리기를 하듯 빚을 떠안기거나, 돈 나갈 일만 만들어 짐만 되는 존재이거나, 아니면 가족끼리도 보증은 서면 안 된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가르쳐주는 존재로 전락했다. 아침 방송엔 원만한 가족관계 유지 비법을 들려주던 특강 대신 개인의 행복과 건강, 성공에 대해 설파하는 특강이 자리잡았다. 가족끼리는 서로 얼굴만 바라봐도 울화가 터지는 시대,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는 본격적인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넝쿨당과 서영이가 떴다, 막장의 출구가 보였다

자극과 감동을 동시에 바라는 
시청자를 어떻게 만족시킬까 
콩쥐에겐 착한 남편을, 
팥쥐에겐 난치병을 주는 것이 
막장드라마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가족 위기를 인정하고 
현실적 해법을 제시하려는 
작가들의 노력도 계속되었다 
‘넝쿨당’은 가족들의 연대로 
‘내 딸 서영이’는 관계의 회복으로 
다시 행복을 꿈꾸고 있다

136022404758_20130208.JPG
가족드라마의 진화 (* 클릭하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제위기 속에서 정권이 바뀌고, 모두가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든 새 시대의 희망과 밝은 비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1998년 3월, 문화방송은 새 일일드라마 방영을 시작했다. 올곧은 신사 타입의 검사인 형 정보석은 간호사로 일하는 악바리 동생 김지수와, 자유분방한 성격의 방송국 무용단 안무가 동생 허준호는 귀엽고 철없는 대학원생 언니 윤해영과 애정전선을 꾸렸다. 거기까진, 사람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시청을 했다. 그러나 두 커플이 모두 결혼에 골인을 하며 형제-자매 간의 혼인이 성사되자 여론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형제랑 자매끼리 저렇게 결혼해도 되는 거야? 저게 가능해? 드라마 속 사건을 두고 과연 이게 민법상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논의까지 진행됐고, 국어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었으나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쓸 일이 없었던 단어 ‘겹사돈’이 시대의 키워드로 등극했다. 막장드라마계의 여제, 임성한 작가의 첫 메가히트작 <보고 또 보고>의 등장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겹사돈 하나쯤 있는 게 뭐 대수랴 싶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홈드라마에 이런 설정을 넣는 것은 굉장한 파격이었다. 겹사돈 설정에 김지수의 막냇동생 박용하와 김지수의 직장동료 성현아 사이의 연상연하 커플을 얹었을 뿐인데, <보고 또 보고>는 억지 설정 논란이나 선정성 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논란이 있다는 건 그만큼 보는 이도 많았다는 뜻. 평균 시청률 44.6%, 최고 시청률 57.3%로 일일극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원래 6개월만 방영하기로 하고 9월에는 끝났어야 했던 <보고 또 보고>는 부동의 시청률 1위를 지키며 무려 6개월을 더 연장하기에 이른다. 불임에 고민을 하다 이혼까지 생각했던 김지수가 종영이 다가올 무렵 임신에 성공하고, 공교롭게도 언니 윤해영과 같은 날에 출산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지키는 안전한 결말까지. <보고 또 보고>는 종영하는 순간까지 ‘억지네’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꾸역꾸역 1년을 채워 막을 내렸다. 임성한은 그렇게 홈드라마 시간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00459606605_20130208.JPG
<보고 또 보고>가 그 이전까지의 홈드라마와 다소 달랐던 점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굉장히 희박했다는 점이다. 극 중 윤해영과 김지수의 아버지로 나오는 정욱은 맨날 실패만 해 아무런 경제력이 없고, 가정의 생계를 복덕방을 운영하는 아내 김창숙에게 맡긴 것으로 묘사된다. 정보석과 허준호의 아버지로 나오는 이순재도 마찬가지다. 극 중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육자로 나오는 이순재는 경제력과 도덕적 권위를 모두 지닌 존재지만, 가정 내 헤게모니를 틀어쥐지는 못한다. 일례로 극 중 독립해 살고 싶었던 허준호는 아버지가 아니라 돈이 많은 할머니인 사미자에게 손을 벌려 오피스텔을 얻어낸다. 전통적인 가정 형태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겹사돈 맺기는 우여곡절 끝에 강행되고, 아버지는 여전히 권위를 세우지만 경제력이 없거나 혹은 적당히 우회해도 되는 존재로 그려진 것이다. 지금 보기엔 막장이라는 말을 쓰기가 미안할 정도로 얌전한 드라마지만, <보고 또 보고>는 분명 시대의 불안을 홈드라마 장르 안에 반영한 작품이었다. 아버지는 사라져 가지만 그 자리를 대체할 질서는 보이지 않는 시대, 결국엔 출산을 통해 ‘정상 가족’을 완성해야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시대의 불안 말이다.

임성한의 아성을 깬 건 임성한 본인이었다. 임성한은 <인어 아가씨>, <왕꽃 선녀님>, <하늘이시여>의 연타석 홈런을 통해 거의 혼자 힘만으로 ‘막장드라마’를 하나의 굳건한 장르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점점 지워지거나 혹은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4명의 여자에게서 4명의 배다른 자식을 남긴 채 무책임하게 죽어버리거나(<온달 왕자들>), 엄마와 가족들을 버리고 새 여자에게 가는 바람에 동생의 죽음과 엄마의 실명을 불러왔거나(<인어 아가씨), 가족의 반대를 이기지 못한 채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무능한 존재다(<왕꽃 선녀님>, <하늘이시여>).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가부장제의 실패에서 출발한 드라마가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위해 택하는 길 또한 가부장제였다는 점이다. 자신을 버린 양부모를 떠나 친부모를 찾아 행복을 찾거나(<왕꽃 선녀님>), 아이를 낳은 것을 계기로 실어증을 극복하고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을 다짐하는(<하늘이시여>) 해피엔딩은 전통적인 가정으로의 회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시집과 남편과의 원만한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는 데 실패한 <인어 아가씨>의 은아리영(장서희)은 남편을 피해 달아나다 결국 차에 치여 사망한다.

가부장제 자체의 실패로 시작했으나, 결말부에선 ‘나쁜’ 가부장의 폐해를 ‘착한’ 가부장의 그늘 아래서 극복하는 해피엔딩. 가정 내에서 폭발하는 욕망을 마음대로 그리고는 싶으나, 행복하고 안전한 결말을 원하는 시청자를 만족시켜 줄 복안은 뾰족한 게 없었던 작가들에게 이 도식은 한줄기 구원이었다. 물론 드라마가 요구하는 ‘착한’ 가부장이 되려면 압도적인 재력이 있는 동시에 인자하고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하는 초인이 되어야 하지만, 임성한과 서영명, 그리고 어느 순간 훈훈한 가족극에서 막장드라마로 노선을 선회한 문영남(<조강지처 클럽>, <수상한 삼형제>) 등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현실성에 대한 지적은 사치가 되었다. ‘나쁜’ 가부장 아래에서 고통받는 가족 구성원들이 빚어내는 갈등은 불꽃놀이처럼 현란하게 전시되지만, 어영부영 갈등을 수습하고 좋은 짝을 만나 ‘착한’ 가부장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 그뿐.

<보고 또 보고> 이후 10년이 흐른 2008년,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막장드라마가 등장한다. “남편은 내 친구와 바람이 나서 날 죽이려 들었지만, 나는 눈 밑에 점을 찍고 머리 스타일을 바꿔 다른 사람인 것으로 위장한 다음 남편과 친구를 파멸시키겠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막장드라마계의 전설, 김순옥 작가의 <아내의 유혹>이다. 이제 남편은 ‘나쁜’ 가부장 수준이 아니라 가정 내에서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범죄자가 되었고, 가정은 갈등을 해소하는 곳이 아니라 생과 사를 가르는 복수의 무대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복수가 너무도 처절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만한 해피엔딩을 만들 방법이 없자, <아내의 유혹>은 작중 악역에게 위암을 안겨주어 모두의 용서를 이끌어낸 다음 동반자살로 퇴장시켜 버림으로써 극을 마무리했다. 난치병으로 갈등을 푸는 방법은 그 이듬해 등장한 문은아 작가의 <너는 내 운명>에서도 반복된다.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시어머니가 갑자기 백혈병에 걸리고, 마침 정확하게 일치하는 골수를 보유하고 있던 며느리 새벽(윤아)의 골수 기증을 통해서 갈등이 봉합되는 전개는 ‘너는 내 골수’라는 쓸쓸한 유행어를 남겼다. 홈드라마 속 가족 내의 갈등은 ‘착한’ 가부장이 등장하거나, 악역이 난치병을 앓아서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만 극복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물론 당대의 모든 드라마 작가들이 가정의 갈등 해소 기능에 대한 냉소만을 그린 건 아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김수현은 <사랑이 뭐길래>에서 시작해 최근작 <무자식 상팔자>에 이르는 일련의 홈드라마들을 통해,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공동체는 새 시대 새로운 갈등을 어떻게 포용하고 화합해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거듭날 것인가를 꾸준히 탐구해왔다. 신세대 며느리나 엑스(X)세대 딸은 어떻게 대가족 안에 화합할 것인가(<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자폐아동을 키우는 가정은 어떻게 고통을 받아들이고 전진할 것인가(<완전한 사랑>), 딸의 이혼과 폭력 사위 앞에서 전통적인 가정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가(<부모님 전상서>), 게이 아들(<인생은 아름다워>)이나 미혼모가 된 딸(<무자식 상팔자>)을 이해하고 품는 건 가능한 일인가. 김수현은 늘 새 시대의 갈등을 부정하지 않고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인생과 욕망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가족공동체를 유지·보완해서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나 김수현 혼자서 막장드라마의 유행을 막을 수도, 가정의 붕괴를 막을 수도 없는 법. 김수현의 작품들은 걸작의 칭호를 얻었을지언정 드라마판의 조류를 바꾸는 작품이 되진 못했다.

00309067405_20130208.JPG
인어 아가씨(MBC) 2002.6.24~2003.6.27
오히려 희망은 거장이 아닌 젊은 작가들로부터 도착했다. 박지은 작가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쿨당>)을 쓰면서 기존의 주말극이 다루곤 했던 요소들을 하나하나 새로 꺼내어 사용했다. 출생의 비밀, 보수적인 시집과 알파 며느리 사이의 갈등, 남편의 불륜 등의 요소는 막장드라마의 장르 클리셰였다. 그러나 <넝쿨당>은 알파 며느리를 무작정 시집의 위계질서에 복속시키지도, 악역에게 불치의 병을 내리지도 않는 이성적인 결말을 찾으려 노력한다. 큰사위(김형범)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가부장의 권위에 기대거나 ‘정상가족’을 복원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머니와 이모들, 세 자매와 며느리까지 온 집안의 여자들이 총출동해 큰사위를 응징하는 길을 택한다. 서로간의 갈등이나 불화가 존재하는 와중에도,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사건이 생기면 어깨를 겯고 함께 난관을 돌파하는 여성들의 연대는 새로운 가족 질서의 도래를 암시한다. 뒤이어 방영되고 있는 소현경 작가의 <내 딸 서영이> 또한 마찬가지다. <내 딸 서영이>에 나오는 아버지들은 서툴거나 무력하다. 가족 안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서영(이보영)은 든든한 남편(이상윤)이 제공하는 착한 가부장의 품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대신, 이혼을 통해 왜곡된 관계를 청산하려 한다. 남편 또한 이혼을 받아들임으로써 매듭을 다 풀어헤치고, 아내와 다시 처음부터 관계를 쌓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지만 새로운 관계 질서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새 시대의 갈등은 과거의 규율로는 통제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해졌지만, 새로운 질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의 분출이 피로를 가중시켰고, 공동체는 와해 직전에 몰려 있는 지금, 소통과 이해를 이끌어내는 새로운 질서에 대해 말하는 홈드라마가 당대 최고 수준인 4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건 어쩌면 징후적인 현상일지 모른다. 한국의 가정은 과연 갈등을 해소할 새로운 출구를 찾아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이번 설에는 가족 친지들과 조금 더 많이 대화를 해보자. 어쩌면 진짜 해답은 티브이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당신 곁의 사람들에게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1308 [책읽는부모] [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2] cider9 2013-02-12 3770
1307 [책읽는부모] [아빠와 함께하는 하루 10분 생활놀이] 앗싸! 사진 올립니다^^ imagefile [4] 난엄마다 2013-02-08 4446
1306 [가족] (2013) 뽀뽀야 반가워^^ file [1] yangnaudo 2013-02-08 4263
1305 [가족] [2013] 엄마를 녹이는 방글이♥ imagefile [1] 꽃송이가 2013-02-08 4316
1304 연휴에 영화 뭐 볼까? image 베이비트리 2013-02-08 4100
» ‘서울 뚝배기’에서 ‘내 딸 서영이’까지 image [1] 베이비트리 2013-02-08 5518
1302 [책읽는부모] 엄마와 연애할때 _ 처음..그리고 늦은 후감 file [2] shr282 2013-02-08 4004
1301 [책읽는부모] 평생 책읽기 습관이 결정되는 나이 file [4] anna8078 2013-02-07 5958
1300 [가족] [2013] 둘째 돌을 앞두고 imagefile [2] lizzyikim 2013-02-06 4356
1299 [가족] [2013] 복덩아 고마워~ imagefile [1] rakdgh12 2013-02-05 4185
1298 [자유글] 카카오 스토리 유형 분석 [2] guk8415 2013-02-05 4508
1297 [자유글] 33개월 개똥이에게 '꼬마버스 타요'를 허하노라. [10] 강모씨 2013-02-02 4682
1296 [가족] (2013) 1월 5일 태어난 가람이입니다 imagefile [8] lotus 2013-02-02 4266
1295 [책읽는부모] <엄마와 연애할 때> 아빠에겐 색다른 책! [3] kuntaman 2013-02-01 4489
1294 [책읽는부모] <아빠와 함께 하는 하루 10분 생활놀이> 아직은 어렵지만... imagefile mosuyoung 2013-02-01 5015
1293 [자유글] 재롱잔치의 계절 imagefile [2] 분홍구름 2013-01-31 9632
1292 [가족] [2013 둥이] 건강이가 찾아왔어요~ imagefile [2] 페퍼민트티 2013-01-31 4299
1291 [책읽는부모] <아빠와 함께하는 하루 10분 생활놀이> imagefile [5] ahrghk2334 2013-01-31 7648
1290 [책읽는부모] <아빠와 함께하는 하루 10분 생활놀이> 10분?, 10번! imagefile [1] 강모씨 2013-01-30 5284
1289 [자유글] 카시트 훈련을 경찰에게 떠넘기다 [4] 강모씨 2013-01-30 4115

인기글

최신댓글

Q.아기기 눈을깜박여요

안녕하세요아기눈으로인해 상담남깁니다20일후면 8개월이 되는 아기입니다점점 나아지겠지 하고 있었는데 8개월인 지금까...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