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913208580_20140828.JPG » 김영희 문화부장[편집국에서] 슈퍼맘과 이별하기 / 김영희

모처럼 밤 9시 전에 귀가한 날, 결국 작은아들과 한바탕했다. 중간고사 직후부터 학교 축제 준비로 바쁘다며 밤 10시 넘어 온 아이는 휴대전화 삼매경이다. 20분만 있다 책 봐라… 10분만 봐준다…, 그러다 폭발했다. “엄마는 오자마자 동동거리며 밀린 집안일 다 해놓고 기다렸는데”로 시작한 나의 짜증과 한탄이 계속되자, “네, 네”, 대답만 하던 아이가 아예 돌아눕는다.

안다. 어쩌다 한번 일찍 들어온 엄마의 ‘생색’은 머리 굵은 아이에게 통하지 않음을. 그런데도 왜 이 ‘슈퍼맘’ 코스프레를 벗어던지지 못할까.

고3과 중3 아이를 둔 맞벌이 엄마 독자로서, <한겨레>가 최근 싣는 ‘저녁 있는 삶’ 시리즈를 열심히 읽는다.

아이들이 태어났던 당시는 2개월 출산휴가가 고작, 육아휴직은 상상도 힘든 때였다. 그래도 가까운 놀이방과 친정의 도움을 받는 행복한 조건이었다.

사람 마음을 피폐하게 하는 건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남편의 다음주 일정을 체크하며 누가 친정집에서 아이들을 찾아올까 정하거나, 친정과 남편 사이 갈등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사이에 낀 감정노동이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계획에 없는 저녁 약속, 술 한잔은 엄두를 못 냈다. 눈비 오는 아침, 내 짐과 아이 짐을 양쪽에 메고 비닐 씌운 유모차를 힘겹게 밀 때면 왠지 눈물이 났다. 귀가 뒤나 주말엔 늘 일과 휴식과 가사노동이 뒤섞여 있었다.

많은 일하는 여성들이 그렇다. 여성학자 조주은씨는 <기획된 가족>에서 “자연스레 한 시간을 다른 사람의 세 시간처럼 사용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는 중산층 맞벌이 여성들의 지독히 바쁜 일상을 ‘압축적 시간경험’이라 표현했다. 어디서나 일이 가능한 정보통신기술 발달을 배경으로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직업맘은 경제적 동맹체인 중산층 가족을 유지하는 ‘기획자’가 됐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 가족기획의 승부처는 ‘슈퍼맘’ 역할이다. 특히 아이가 학교에 가면 엄마의 책임이 본격화된다. ‘가짜 스펙’으로 아이를 대학에 넣은 엄마의 극단적 사례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핵심은 성적)이 엄마의 몫임을 상징한다. 학교 봉사 당번부터 학원 상담까지 ‘엄마 대상’을 당연시하는 교육 환경과 대치동맘, 스칸디맘 등 온갖 슈퍼맘 열풍 또한 여성들의 자괴감을 부추긴다. ‘내가 모성이 모자라 혹은 게을러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아빠의 육아 참여가 늘었다곤 하나, ‘아빠=놀아주기’ ‘엄마=성적관리’라는 분업을 강화하는 면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내게 한계는 또렷해 보였다. 밤에나 얼굴 보는 아이가 ‘관리’가 될 리도 만무하거니와, 수행평가부터 목표 전형에 맞춘 과목별 성적관리까지 ‘엄마 매니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교육 시스템에 순응하라고 닦달하는 게 진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인가 회의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엄마의 짜증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가 아이 키우기 어려운 노동환경과 국가의 정책,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이와 함께 사람들이 ‘슈퍼맘’의 열망을 내려놓지 않는 한 한계가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1년 보고서를 보면 유연근무제 도입 뒤 여성은 75.8%가 남은 시간을 육아에 쓴 반면, 남성은 46.5%만이 할애했다. 슈퍼맘과 이별을 말하지만 나 역시 언제 또 이 병이 도질지 모를 일이다.

“콤플렉스란 몰라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 이중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데서 올 수도 있다. 슈퍼우먼과 슈퍼맘이 허상임을 알고 있어도 우리 시대와 사회를 휩쓴 치열한 경쟁의 물살에서 자기 가족을 구원해 줄 동아줄로 여기고 놓지 못하는 것이다.”(<내 안의 여성 콤플렉스 7>)

김영희 문화부장dora@hani.co.kr

(*한겨레 신문 2014년 10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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