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나무 식혜

[나는 농부다] 숨쉬는 제철 밥상

늦여름 가마솥더위에 우리 모두 수고가 많다. 이렇게 푹푹 찌면 자동으로 찬 것을 찾게 된다. 찬 걸 먹으면서 이래도 되나 걱정은 되지만 당장 급하니까. 찬 음식을 먹으면 입은 즐겁지만 뱃속이 고생을 한다. 복날에 삼계탕 같은 뜨거운 음식으로 보답을 하지만 이걸로 다 될까?

무주구천동에서 백련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할매 한 분이 엄나무 껍질을 팔면서 “이걸로 식혜를 해 먹어” 하신다. 그동안 수고한 위장에게 엄나무 식혜를 선물해 볼까? 엄나무를 가져왔지만 해본 적이 있나? 남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본 적도 없다. 엄나무 껍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일단은 해보기로 했다.

엄나무는 코뿔소처럼 생긴 가시가 빈틈없이 달린 가시나무다. 엄나무는 이름 그대로 음기가 강한 나무란다. 차고 축축한 기운이 몸에 침투하여 생긴 여러 가지 증상에 좋단다. 봄에 햇순이 올라오면 그 햇순을 나물로 먹고, 껍질이나 잔가지를 푹 달여 차로 마신다. 푹 달여서 그 물에 식혜를 하면 좋겠지. 하지만 무더운 집안에서 몇 시간이고 엄나무를 달일 엄두가 안 난다. 내가 잘하는 얼렁뚱땅 버전으로 해보자.

엄나무 네 조각을 깨끗이 씻은 뒤 맹물에 넣고 한나절 불렸다. 식혜 밥은 쌀을 씻고 나서 10분 정도 체에 받쳐 뜨물을 다 빼내고 앉힌다. 여기에 엄나무와 엄나무 불은 물을 넣고 식혜 밥을 한다. 밥을 어느 정도 식힌 뒤 베보자기에 엿기름(쌀의 반 정도)을 넣고 엄나무 불은 물 남은 것에 조물조물한 뒤 베보자기와 국물을 다 전기밥솥에 넣고 보온으로 해둔다. 5분도미라 보온을 9시간쯤 하니 밥알이 동동 뜨고, 엄나무 향이 솔솔 난다. 엿기름이 담긴 베보자기만 들어내고 나머지는 가스불에 얹어 팔팔 끓였다. 엄나무 성분이 얼마나 우러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나무 향이 쌉싸래하게 나는 게 몸보신이 될 듯하다.

우리 집은 식혜를 따뜻할 때 먹는다. 또 식혜를 할 때 설탕을 넣지 않고 자연의 단맛을 즐긴다. 설탕을 넣지 않고 식혜를 하려면 밥과 엿기름에 견주어 물을 적게 잡아야 맛이 난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파는 식혜가 엿기름 삭은 맛이 첨가된 설탕물이라면 우리 집 식혜는 엿기름 죽에 가깝다. 밥알이 많아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하니 한 그릇 먹으면 배가 든든하다.

이게 무슨 맛일까? 첫맛은 솔직히 싱겁지만 한 그릇 다 먹고 나면 자연의 단맛이 은은하다. 마침 쌈된장이 다 떨어져 보리죽 대신 식혜 밥을 건져 된장과 섞어 한 병 만드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이 별난 식혜를 맛보신 분들은 설탕을 넣지 않고도 식혜가 되는 걸 처음 알았다며 ‘구수하고 든든하다’고 하신다. 설탕을 넣어 달달하고 그래서 물을 넉넉히 넣은 차가운 식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처럼 달지도 않고 따뜻한 식혜도 있다. 뱃속님! 저녁으로 식혜 진국 한 대접 어때요? 


장영란 <숨쉬는 양념·밥상> 저자


(*한겨레신문 2013년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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