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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한겨레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 내 안에 웅크린 그것
착하다고 소문난 남편과 사는 아내의 비애

우스갯소리로라도 내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 나와 친한 주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나를 면박주고 남편 역성을 든다. 너처럼 성질 까칠한 여자와 무탈하게 사는 게 쉬운 줄 아느냐, 무던한 남편 고맙게 생각하고 살라는 것이다. 내가 발끈해서 “착하다고 소문난” 남편과 사는 부인들의 고충을 몰라 하는 소리라고 볼멘소리를 하면, “똑똑하다고 소문난” 여자와 사는 남편들의 고충도 적지 않다고 응수한다. 나와 달리 말수가 적고 의사표현이 뜨뜻미지근한 남편은 매사 점잖고 마음 넓은 콩쥐로 인정받으니 나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뭘 먹을까?” “어디 갈까?” “이걸 살까, 저걸 살까?” 대부분의 질문에 남편의 대답은 들어보나 마나다. “당신 좋을 대로….” 결국 소소한 일들을 결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내가 실권을 가진 표독한 팥쥐로 비칠 수밖에. 하지만 이렇게 말수 적고 미온적으로 보이는 사람들 고집이 얼마나 완강한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하는 속내를 누가 알리. ‘착하다고 소문난 남편과 사는 아내들의 모임’이라도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나랑 사는 것도 피곤하겠다” 싶을 때가 있긴 하다. 내 안에 모순적으로 존재하는 양가적 감정 때문이다. 남편의 가부장적인 군림은 거부하면서도, 때때로 난 가장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보살핌을 받는 피보호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른바 ‘강한 남자’에 대한 동경과 의존성. 티브이에 나오는 팔뚝 굵은 근육남 마초 이미지에 여성 시청자들이 혹하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의식으로는 양성평등을 지향하지만,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난 전근대적 여성과 개화기 여성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데이트 비용의 대부분을 남성이 부담해야 한다고 여기거나 수시로 감동적인 깜짝 이벤트를 벌여주기를 바라는 일부 젊은 여성들의 공주병도 아직 개화되지 못한 전근대적 여성성의 산물이다.

가족을 부양하고 아내를 보호해주는 강하고 능력 있는 남자이면서, 여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민주적인 남편이 모든 아내들의 소망이지만 현실은 그런 판타지를 무참히 박살낸다. 남편 혼자 가족을 부양하기 힘겨운 경제현실에서 그나마 생계유지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 밖에 머물러야 하는 남편은 더이상 절대적인 가장이 아니다. 가장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강한 남자일수록 가부장적 권위로 가족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애쓴다. 강하면서 사려 깊은 남편이 아니라 독단적이면서 편협한 마초가 되어 결국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가족들로부터 외면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 그 짐 내려놓으라고, 당신 혼자만의 짐이 아니니 힘들면 내게 기대라고 남편을 격려해야 마땅하지만, 선뜻 입이 안 떨어지는 이유를 어찌 설명할까. 남자가 다 알아서 해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개화기 이전의 여성이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 버티고 있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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