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개봉을 앞두고
그의 전작들을 모아 보았다.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를 보고 난 뒤
배트맨 영화를 흔하디 흔한 오락 영화로만 생각해 온 편견을 버리게 되었다.
특히 <다크 나이트>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아주 흥미로웠다.
영화를 보면서 '(조커 같은) 악인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인간은 최악의 조건에서도 선을 발휘할 수 있나?',
'악에 맞서면서 어떻게 악이 되지 않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다크 나이트.jpg

그 중에서도 교사이자 육아를 담당하고 있는 아빠인 나는
'악에 맞서면서 어떻게 악이 되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에 특별히 더 관심이 갔다.
영화에서 절대악으로 그려지는 조커에 맞서 정의를 지키려는 인물로
하비 덴트 검사와 배트맨이 나온다.
그런데 선의 대변자였던 하비 덴트 검사는 자신의 여자 친구가 조커에 의해 죽고,
자신의 얼굴도 화상을 입은 뒤 악당으로 돌변한다.
한편 배트맨은 인간의 분노와 복수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함정을 파는 조커에 맞서면서
스스로 악이 되지 않아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다.

이때 '악이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악에 맞설 것인가?'라는 배트맨의 고민은
교실이나 가정에서 교사나 부모가 하는 고민과 맞닿아있다.
교실에서 앞에 앉은 친구의 머리를 툭툭 치는 장난을 하는 아이가 있다.
교사가 그 아이를 불러 '왜 그랬니?'하고 물으면 그 아이는 이렇게 답한다.
'장난으로 그런 건데요.'
이 말을 들은 교사는 화가 난다.
그래서 그 아이가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아이의 머리를 툭툭 쳐서라도 그 아이를 지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언니나 형이 동생을 때리는 모습을 보면
'너도 한 번 맞아봐라. 동생이 얼마나 아플지, 어떤 기분일지.'
하는 심정이 될 때가 있다.


지난 금요일,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아내가 아이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준다.
아내가 씻는 동안 푸닥닥 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나와 보니 선율이는 울고 있고, 신영이는 책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걸 본 아내가 선율이에게 물었다.

아내: 언니가 때렸어?
선율: 아니.
아내: 언니가 밀었어?
선율: 응.
신영: 엄마, 그게 아니고, 내가 선율이 썰매 태워주려고 했는데,
선율이가 손을 놓아서 넘어졌어.

썰매에서 떨어지면서 넘어진 선율이가 '언니, 미워.'하며 신영이를 밀었고,
신영이도 성질이 나서 선율이를 팍 밀었다고 한다.
그때 선율이가 '으앙' 하며 울음을 터뜨린 거다.
선율이 이마가 부은 걸 본 아내는 화가 솟구쳤다.
그런데 마음을 진정시키고 신영이에게 말했다.

아내: 아까는 선율이가 코피까지 터질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어.
그걸 보니까 엄마는 너무 화나고, 놀랐어.
얼마나 화가 났냐면 엄마도 똑같이 때려주고 싶을 만큼 화났어. 속도 상하고.
근데 엄마가 참고 있어. 엄마가 너희들 안 때린다고 약속했으니까.

이 말을 듣고 신영이는 울먹였다.
아내는 선율이에게도 말했다.

아내: 선율이 너도 언니 밀면 안 돼.
선율: 나는 살살 밀었어.
아내: 살살이든 세게든 너도 언니를 밀면 안 되는 거야.
니가 밀면 수현이도 너를 밀 수 있는 거야.

그러고 나서 신영, 선율이에게
둥지(미끄럼틀 아래 작은 공간을 아이들이 둥지라 이름 붙였다)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누나가 우는 걸 본 수현이가 면 기저귀를 끌고 가더니
선율이를 안아주고, 면 기저귀를 갖다주었다.
아내가 '수현아, 큰 누나도 안아줘'하자 수현이가 신영이도 안아주었다.
잠시 후 신영이가 선율이에게 사과를 했다.

신영: 선율아, 내가 세게 밀어서 미안해.
선율: 언니, 나도 살살 밀어서 미안해.

그렇게 서로 화해한 뒤 둥지에서 나와 함께 그림책을 보며 같이 놀았다고 한다.


얘기를 전해듣고, 수현이의 행동에 놀랐다.
이제 두 살 된 아이가 우는 누나를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려 하다니...
참 기특하고 용하다.
그리고 아내가 화나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차분하게 대응해서 다행스러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화 나는 장면이 바로 힘 없는 동생을 때리는 거다.
그럴 땐 똑같이 때려서라도 동생 기분이 어떨지,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가르쳐주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때린 아이를 똑같이 때리고 나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

'때리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기 위해 아이를 때리는 모순의 결과는
학교에서 종종 관찰할 수 있다.
친구를 때린 아이의 아빠가 담임을 만나러 학교에 와서
'친구 때리지 말랬지!' 하며 자기 아들을 때리는 경우가 있다.
때려서라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행동은
오히려 '힘 있는 사람은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힘 없는 사람을 때려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큰 아이가 동생을 밀거나 때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동생을 때리면 안 돼.'라고 말해도 화를 못 참고 끝내 동생을 때리는 걸 보면
화도 나도 답답하다.
지난 금요일 아내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화 나는 자기 감정을 바라보고
아이를 똑같이 때려주고 싶은 유혹을 물리쳤다.
그리도 두 아이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아내 자신도 아이를 때려주고 싶을 만큼 화가 나지만,
때리지 않고 말로 화난 감정을 전달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 날 일을 내게 전해준 뒤 아내는
'내가 성질 내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고,
말로 표현해서 풀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 또한 다행스러웠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절대악 조커를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를 죽이지 않았다.
배트맨이 악에 맞서면서 악이 되지 않는 길을 선택할 때,
아내가 동생을 때린 큰 아이를 지도하면서 때리지 않았을 때,
배트맨과 아내는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었다.
부모도 불완전한 인간인 이상 감정의 노예가 되는 때도 있지만,
자기 감정을 알아차리고,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할 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닌 새로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때 아이 또한 억울함과 화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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