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 가족
밖에선 ‘님’ 집에선 ‘남’ 남 보란 듯 살아요

▶ 행복한 결혼의 조건으로 단연 ‘사랑’을 꼽는 시대입니다. 한데 로마 시대에는 부부가 남들 앞에서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했다는 걸 아시나요? 따지고 보면,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온 건 얼마 안 됐어요. ‘사랑 호르몬’의 유효기간은 고작 2년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지요? 평균수명 100살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부부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남편과 자식에 헌신한 세월
어느날 허무감이 몰려왔다
남편은 변한 아내가 답답하다

불행을 들키고 싶지는 않아
잘 사는 척 다정한 체…
그런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만나면 ‘부럽다’고들 하죠.”

남편 박상수(가명·49)씨가 생각해도 “그럴 만하다”. 고시를 패스한 박씨는 대기업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고 있는, 한마디로 잘나가는 남자다. 그의 아내 차윤정(가명·47)씨는 전업주부로, 마흔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미인’이다. 대학생·고등학생 두 아이는 크게 속 썩이는 일 없이 제법 공부도 잘한다. 회사 행사는 물론, 아내의 동창 모임에까지 부부가 함께 참석하니 정말 부럽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들 “속 모르고 하는 얘기”다. 박씨 부부는 벌써 2년 반 넘게 각방 생활을 하고 있다. 부부동반 모임에서 웃고 떠들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말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부부동반 모임에서 한 번이라도 아내를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꿈에도 그런 모습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라고 박씨는 생각한다. 아내는 부부동반 모임에만 가면 영판 딴사람이 되니 말이다. 상대방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 네네~” 호응을 잘해주는 아내는, 박씨가 아는 사람이 맞나 싶다. “우리 그이는요~”라며 이따금 흉인지 자랑인지 얘기하는 아내가 박씨는 “가증스럽다”. 집에만 오면 웃음기 가신 얼굴로 불만만 털어놓는 아내가 아닌가.

각방 생활을 하기 한참 전부터 부부 관계는 삐거덕거렸다. 차씨는 언젠가부터 “내 인생은 이게 뭔가”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학벌이 기운다며 시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한 뒤로, ‘보란 듯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노라’며, 박씨와 아이들 뒷바라지에 헌신한 세월이었다. 덕분에 남편은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진을 거듭했다. 그런 남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맘 한켠은 씁쓸했다. 남편은 바쁘다며 매일 밤늦게 들어왔고,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는 날이 많았다. 가족은 늘 뒷전인 것 같았다. 대화는 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공통의 대화 주제는 점점 더 찾기 힘들어졌다. “내게 남은 건 뭔가. 난 그냥 아줌마가 됐고, 평생 남편 인생에 들러리만 섰다.” 차씨는 이런 생각에 자주 분통이 터졌다. 특히 남편이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에 다녀왔다는 걸 안 뒤로는 울컥울컥 화가 치민다. ‘이러다간 버림받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에 불안해하는 자신도 싫다.

아내의 이런 불만, 걱정을 박씨도 모르지 않는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 왜 없겠나. “아내에게 잘하고 싶다.” 다만 “뭘 해도 아내의 마음을 채워줄 수 없을 것 같아” 답답하다. 아내의 불만은 늘 ‘가정법’이다. “만약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당신 뒷바라지만 하고 살지 않았더라면…” 하는 식이다. 도대체 무슨 답을 해달라는 건지 모르겠다. 매일 울상만 짓는 탓에 연애 시절 예뻤던 아내의 얼굴은 잘 기억도 안 난다. “돈 걱정 말고 취미 생활도 하고, 자유롭게 친구들도 만나.” 박씨 딴엔 아내를 위한다고 한마디 했다가 “책임만 떠넘긴다”고 욕만 먹었다. 어쩌란 말인지. 청소를 하라면 청소를 하고, 일찍 들어오라고 하면 가능한 한 일찍 들어오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아내는 “시킨 것만 한다”고 타박이다. “정말 끝이 없다”고 박씨는 생각한다. 자연히 싸우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박씨나 아내 둘 다 이혼할 맘은 없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말은 듣기 싫고, 불행한 모습을 들키는 건 더군다나 내키지 않는다. “잘 해보고 싶다”는 맘도 있다. 그래서 서로 약속을 했다. 일종의 ‘휴전협정’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하나,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 불만이 있을 땐, 문자로 얘기한 뒤 따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둘, 부부동반 모임에는 늘 함께 참석한다. 밖에서는 가능한 한 다정한 모습을 보여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준다. 셋, 일주일에 최소한 두번 이상 대화를 나눈다. 만일 한번 약속을 어기면 두번 외식을 한다 등등…. “가족을 깨지 않기 위해서 이 정도는 노력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어디 약속대로 굴러가던가. 외식을 하기로 한 날, 박씨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약속을 못 지키는 일이 생길 때도 있는 것 아닌가. “대신 원하는 선물을 사주겠다”고 무심코 얘기했다가, 박씨는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든다”고 아내한테 된통 당했다. 아내는 “내가 원하는 건 진심”이라고 말했다. 박씨 입장에선 속이 터진다. “진짜로 미안해서 그런 건데, 진심이 없다니 도대체 아내가 말하는 진심은 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정은 ‘유지’된다. 서로가 요구한 대로 약속을 이행하는 한. “이건 부부 관계가 아니라 거래 관계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도 뭘 어쩌겠는가. 가끔은 외식하고, 팔짱을 끼고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해 하하호호 웃다가 돌아오는 연극 같은 일상. 정말 별일은 없다. 문제는 “이대로 괜찮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쇼윈도 부부, 24시간 군복을 입고 사는…

실제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공식 석상에선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는 부부를 두고 ‘쇼윈도 부부’라고 합니다. 연예인과 정치인, 기업인 등 유명인들의 이혼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빈번하게 언급되는 용어이기도 하죠. 일본에서는 1980년대부터 ‘가정 내 이혼’이란 말로 이 현상이 주목받기도 했지요.

말을 안 해 그렇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비단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가운데도 쇼윈도 부부처럼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자녀양육 문제나 경제적 이유, 체면 등 갖가지 이유로 한집에 살고 있을 뿐, 개인적인 대화나 부부관계는 물론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이런 부부는 사실상 별거 관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처럼 애정 없는 관계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부부들이 상담소를 찾는 사례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김미영 서울가정문제상담소 소장은 얘기합니다.

김 소장은 “쇼윈도 부부로 산다는 건 24시간 군복을 입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상담소를 찾는 이들 대부분은 쇼윈도 부부로 산다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그는 답답해했습니다. “가족을 유지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김 소장은 “이런 방식은 갈등을 회피하는 것일 뿐 전혀 해소해주지는 못한다”며 “숨기기보다 갈등을 직시할 때 문제 해결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이런 부부들은 대개 자식을 위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지만, 되레 아이들에게 부부간의 친밀감을 배울 기회를 빼앗는 역효과만 낳을 수 있다”고도 얘기했습니다. 이정애 기자


▶ 가족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속 얘기를 사진과 함께 원고지 6장 분량으로 gajok@hani.co.kr로 보내주세요. 채택된 사연에는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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