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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가족 / 차남의 결혼

▶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다시의 사촌은 차남이라 괴롭습니다. 18세기 영국은 장남에게 유산을 전부 상속하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차남 이하 남자들은 군인이나 목사가 되기도 했다는군요. 요즘 차남으로 태어나면 가족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좋기도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는 고민이 많은가 봅니다. 부모의 지원 없이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산을 넘을 수 없는 세태 때문이겠지요. 짠한 어느 차남의 이야기입니다.

“엄마, 나 서운해.”

술기운을 빌려 이재영(가명)씨가 말했다. “그럼 어쩌냐. 우리 형편이 안 되는데. 내가 일부러 그러겠니.” 거실에 앉아 있던 엄마는 텔레비전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최종 결정은 경제권을 가진 엄마의 몫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답답했지만, 말을 한다고 해서 답답함이 풀리진 않았다.

재영씨는 1년 넘게 연애한 여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했다. 만나면 달콤한 말만 주고받던 두 사람의 대화는 결혼을 이야기한 뒤로 다소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결혼식은 어디에서 어떻게 할 거냐, 집은 몇평대로 구할 거냐, 집을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전세로 얻어야 하는지…. 이야기는 항상 깔때기처럼 ‘우리에게 돈이 얼마나 있느냐’로 흘렀다. 사회생활 초년생인 두 사람이 모은 돈은 고만고만했다. 부모님의 지원이 절실했다. 바로 이 문제가 재영씨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는 2년 전 회사에서 은퇴했다. 은퇴 뒤 건강이 나빠지면서 병원 신세도 많이 졌다. 가정 경제는 계속 일하고 있던 엄마의 몫이 됐다. 어려워진 집안 형편 탓에 집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지원을 받기는 힘들어 보였다.

은퇴 뒤 편찮으신 아버지와

혼자 돈 버는 엄마 상황 생각하면

신혼집 해달라기 미안하지만

형 때를 생각하면 억울해진다

첫째라고 집도 사주고 
결혼식 비용도 대준 부모님 
장남이라 더 하는 것도 없는데 
둘째인 난 왜 형만큼 못해주나

이게 형제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었다면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았을 거다. 네 살 위의 형이 4년 전 결혼할 때만 해도 부모님은 집도 사주고 결혼식 비용도 다 대줬다. 취업 직전에 결혼한 형이 돈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첫째 결혼식이라고 기대가 큰 만큼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결혼식도 부모님 지인들로 북적거렸다. 부모님은 축의금까지도 형에게 줬다.

24평 집을 사 결혼 생활을 시작한 형은 아이를 낳고 얼마 전 32평대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재영씨가 알고 있는 형 친구들은 몇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씩 빚을 지고, 그리 크지도 않은 10평대 전세나 월셋집에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그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월급의 대부분을 이자와 원금 상환에 쓰고 있을 때, 형은 그만큼의 돈을 저축해 집 평수를 넓히고 여행하러 다니고 아이도 낳았다. 형 친구들에 비해 형의 삶은 더 풍요로웠고 그만큼 더 여유있어 보였다. 다른 시작점에서 오는 삶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재영씨도 빈손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처럼 빚 갚는다고 아등바등 살며 고생하기 싫었다.

여자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말하고 빚을 내자고 하거나, 네가 집 보증금을 보탤 수는 없냐고 말할까 고민한 적도 있다. 말린 건 친구들이었다.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 이게 대한민국의 법칙이었다. 주변에서 여자가 집을 해왔다거나, 집 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는 경우를 못 봤다. 그녀를 못 믿는 건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결혼하지 말자거나 자신을 비난할 사람은 아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재영씨를 주저하게 하는 건 ‘무능력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었다. 하다못해 전세금이라도 마련하는 것이 결혼에 대한 남자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벼슬도 아닌데 자식이라고 유세 부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너무 당연하게 부모님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나이 들어서도 일하느라 고생하는 엄마에게 짐을 하나 더 얹어주는 것 같아 속상했다. 떼쓰고는 있지만 막상 돈을 받아도 마음이 편할 것 같진 않았다. 빚 안 지고 제대로 된 집 구해 결혼 생활 하려면 부모님의 도움이 필수인 현실도 원망스러웠다. 재영씨에겐 부당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미안해도 집에다 손을 벌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재영씨는 부모님의 지원을 최대한 받고 싶다. 형만큼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서울에 20평대 방 두 개짜리 집을 구할 수 있는 전세금이라도 보태달라고 부모님께 말했다. “차별하는 게 아니다”면서도 엄마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미안해하는 엄마를 보면 ‘결혼한다고 부모님을 벗겨 먹는 건가…’ 싶다가도, 잘사는 형을 보면 ‘공평하게는 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형이 밉지는 않다.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게 부러울 뿐이다.

예전에야 제사 등 집안 대소사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의 무게가 있으니까 부모가 더 많이 지원해주는 게 용인될 수도 있었다. 요즘 세상에 장남 따로 차남 따로가 어디 있나.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자신은 월급의 일부를 꼬박꼬박 드리지만 형은 아무런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재영씨 집안은 제사도 드리지 않는다. 부모님은 장남이라고 꼭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옛날식 강요도 하지 않는다. 장남이라고 집에서 해준 것에 비하면 형이 장남으로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부모님은 집에다 결혼 비용까지 해준 것도 모자라, 이제 아이까지 봐주고 있다. 조카를 계속 봐줘야 할 텐데, 내가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봐줄 수 있을까?

나이 들어서도 부모 덕만 보려고 한다고 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첫째였다면 겪지 않을 일을 둘째라 겪는다고 생각하니 재영씨는 더 포기하기 힘들어졌다. 부모님께 자신은 늘 두번째였다.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도 옷도 형이 늘 먼저였는데 이젠 결혼에서도 밀린다. 누가 둘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둘째로 태어났나.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2013년 1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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