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후

가족 조회수 5334 추천수 0 2014.07.21 18:11:13
[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매년 받는 산부인과 정기검진에는 피임도구 상담도 포함되어 있다. 기한이 십년짜리인 자궁 내 피임장치를 결정하니 산부인과 의사가 대답한다. 십년간 착용하고 난 뒤면 폐경기가 될 테니 여러모로 편리하고 좋을 거예요. 검진을 마친 뒤 병원을 나섰는데, 내게 폐경을 말하는 여의사의 담담한 모습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이제 마흔을 넘겼으니 그럴 법도 한 이야기인데, 구체적 시간으로 다가오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외모와 젊음의 가치가 재화처럼 통용되고 결혼이 시장 논리로 설명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시계는 치명적 속도로 흘러간다. 한정된 가임시기를 두고 쫓기듯 결혼과 출산을 결정하기도 한다. 연애의 자유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한없이 불안한 무엇으로 둔갑한다. 결혼한 이후에도 불안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서른다섯의 여름을 그 어느 해 여름보다 뚜렷이 기억한다. 결혼과 잇따른 출산, 수유, 육아의 과정으로 정신없이 흘러간 6년, 정신을 차려보니 거울 속에는 낯선 내가 서 있었다. 사랑의 진화와 함께 그 장렬한 몰락 또한 가능함을 알기에 묻고 또 물었다. 나는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도 여자일 수 있는 존재일까. 남편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남편만의, 남편만을 위한, 남편만에 의한 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두려웠다.

결혼 전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던 내게 결혼생활을 몇 년 앞서 했던 친구가 말했다. 결혼했으니 이혼도 할 수 있는 거야. 네 인생 전체가 결혼에 달린 것은 아니잖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나의 결혼을 더 용감하게 했고 그 일상을 축복되게 했다. 남김없이 행복했으나, 어느 순간, 양팔에 두 아이를 짊어진 채 희미해진 나를 보며 너무 멀리 나아갔음을 깨달았다. 가족의 행복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나조차 나를 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서른다섯의 늦가을, 20대의 마지막 절반을 보냈던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마지막날엔 오랜 친구를 만나 거리를 산책했다. 여성의 신체시계의 가차없음을 논하던 나를 두고 그가 말했다. 여성성이 왜 가임 가능성에 좌우된다고 믿느냐고. 피임의 부담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그 상태가 얼마나 관능적인지 생각해보지는 않았느냐고. 나는 그의 반문에 뤽상부르 공원 한복판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 젊지만은 않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편안해지는 법을 배워갔다. 돌이켜 보면, 서른다섯의 나는 한창 젊었다. 위태로웠던 이십대와 다르게 아름답게 무르익고 있었음을 이제는 알 수 있다.


 1400838378_00504552501_20140524.JPG » 이서희사랑이 변하고 진화하듯 아름다움도 그러하다. 입 주위에 선명하게 살아나는 팔자주름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이에게 말했다. 이건 말이야, 엄마가 잘 살고 있다고 삶이 찍어주는 도장과도 같은 거야. 숙제를 잘한 너에게 선생님이 찍어주는 ‘잘했어요’ 도장처럼 말이지. 때로는 잔인하고 가차없는 삶의 매혹은 그 절정을 당장 가늠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절정은 여러 차례 찾아올 것이다. 며칠 전 여든살 할머니의 여든넷, 일흔여덟 할아버지와의 삼각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힘이 났다. 그녀의 고민은 열렬했으나 여유로웠다. 사랑에서 이 두 가지를 누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아직은 젊은 나는 경탄했다.

11년차 엄마


(*한겨레 신문 2014년 7월 19일자)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수
281 [가족] 부모와 자녀의 자존감 ‘비례 공식’ 아시나요 imagefile [2] 베이비트리 2014-09-02 6508
280 [가족] 잠자리의 세상구경 [4] 겸뎅쓰마미 2014-09-02 3070
279 [가족] “배냇저고리 동화책, 아이에 선물하는 ‘저고리바람’ 어때요?” imagefile 베이비트리 2014-09-01 5348
278 [가족] 둘째 어린이집 보내기... [4] ILLUON 2014-09-01 3435
277 [가족] [토토로네 미국집] 아이와의 편지쓰기, 덤으로 한글떼기 imagefile [2] pororo0308 2014-08-30 8680
276 [가족] 절대 모르는데 딱 알 것 같은... 겸뎅쓰마미 2014-08-29 2597
275 [가족] 한부모 자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imagefile [1] 베이비트리 2014-08-27 4162
274 [가족] 여성가족부에서 하는 가족愛 발견 이벤트 gongzalji 2014-08-27 2690
273 [가족] [토토로네 미국집] 삼대가 함께한 캠프, 춤바람도 나고... imagefile [4] pororo0308 2014-08-23 7746
272 [가족] 아빠가 돌아왔다 [2] 케이티 2014-08-20 3219
271 [가족] 삼삼이를 아시나요? [3] 꿈꾸는식물 2014-08-20 3470
270 [가족] 기차 좋아하는 아이를 위한 영어 그림책 한 권 소개합니다 imagefile [7] 케이티 2014-08-09 4193
269 [가족] 너희만 놀다오니 좋더나? 괴로운 ‘SNS 시집살이’ imagefile 베이비트리 2014-07-31 4815
268 [가족] <아이와 동화쓰기> 괴물모자3 imagefile [2] 이니스 2014-07-26 3518
» [가족] 십년 후 imagefile 베이비트리 2014-07-21 5334
266 [가족] [토토로네 미국집] 추억의 앨범으로 아이들과 속닥속닥 imagefile [3] pororo0308 2014-07-17 6339
265 [가족]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저녁배달 imagefile [2] satimetta 2014-07-15 3838
264 [가족] 하나라도 백 개인 토끼... [4] 겸뎅쓰마미 2014-07-15 3470
263 [가족] 우리 아들만의 예뻐해주는 방법 [2] 숲을거닐다 2014-07-09 3259
262 [가족] [토토로네 미국집] 새로운 곳으로의 이사, 아이들에게는 이별공부 imagefile [6] pororo0308 2014-07-06 8726

최신댓글

Q.아기기 눈을깜박여요

안녕하세요아기눈으로인해 상담남깁니다20일후면 8개월이 되는 아기입니다점점 나아지겠지 하고 있었는데 8개월인 지금까...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