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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술잔미학 즐기는 주당가족
형은 소주, 동생은 맥주, 누나는 전통주, 사돈은 막걸리, 올케는 와인, 저마다 취향대로 즐기는 낭만음주가족 이야기

‘그들’의 얘기가 주당들 사이에서 풍문으로 돌았다. 알코올 디엔에이를 훅 빨아들이는 얘기들이다. 존경의 마음마저 샘솟는다. ‘눈 떠보니 다음날 새벽이었다, 그 집에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술잔 수에 기절초풍했다, 미국 밀주시대 술집 같다’ 같은 얘기들이었다. 무엇보다 ‘술잔’에 관한 얘기에 꽂혔다. 술잔의 미학까지 즐기는 고수들은 음주계에서도 흔치 않다. 드디어 그들을 만날 기회를 잡았다. 다짐을 단단히 했다. 잔만 구경하고 나오리라! 절대 한 잔도 마시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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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3월1일. 오후 5시. 서울 돈암동의 한 아파트. “오셨어요?” 집주인 문종현(43·홍보영상감독)씨와 아내 이지민(36·‘대동여주도’ 콘텐츠 제작자)씨가 인사한다. 거실에서 4개의 레이저 빔이 뿜어져 나온다. 주인 부부 말고도 2쌍의 커플이 있었다. 자, 이들의 관계도부터 그려보자. 이세민(33·회사원)-배선은(33·회사원)씨 부부는 이지민씨의 남동생 부부다. 문주현(34·국어강사)-지성은(35·영어강사)씨 부부는 문종현씨의 남동생 부부다. 그러니깐 주현씨 부부와 세민씨 부부는 사돈 관계다. ‘사돈과 거하게 한잔한다고? 취재를 위한 설정인가?’ 의심이 발동한다. “처남과 남동생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처남이 결혼하기 전에 같이 살아 자주 어울렸다. 애주가라는 점이 통했다.” 종현씨의 말이다. “자, 마셔봅시다.” 집주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주현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방에서 무언가 들고나온다. 크래프트 비어(소규모 수제맥주) 잔들이다. 다른 한 손에는 크래프트 비어가 들려 있다. 그러자 세민씨가 질세라 가방에서 뭘 꺼낸다. 양은 주전자와 세트인 양은 막걸리잔이다. 누렇다. 어라, 선은씨가 이번에는 와인잔을 탁자에 올려놓는다. “집에 3~4개 부르고뉴 잔이 있는데 오늘은 하나만 가져왔다.” 이게 끝이 아니다. 종현씨가 소주잔을 꺼내오자 지민씨가 양주잔을 가져와 전통주인 매실원주를 따라 마신다. 성은씨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아, 빨리 아기가 나와야 술 한잔 하는데.” 임신부인 성은씨는 오늘 탄산수로 아쉬움을 달랬다. 와인, 전통주, 소주, 맥주, 막걸리가 쭈르르 도열한다. ‘여긴 어딘가, 이들은 누구인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 마셔봅시다” 주인 외치자
동생이 벌떡 일어나
크래프트비어잔 들고 등장
사돈은 가방에서
양은 막걸리잔 꺼냈다

주현씨가 “3년 전부터 맥주에 빠져 잔을 모았다. 같은 잔을 두 개 사서 아내와 마신다. <유럽맥주견문록>을 읽자, 지식이 는 만큼 더 맛이 있더라”고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린다. 주현씨 부부는 명절에도 6~7개의 잔과 맥주를 챙겨 본가에 간다. 성은씨는 “처음에는 시댁에 가서 놀랐다. 다들 각자 잔을 꺼내 알아서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시더라. 자유로운 분위기다. 명절증후군, 명절 스트레스 같은 것 겪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선은씨도 지지 않는다. “일찌감치 주도를 시아버지(지민씨의 부친)가 가르쳤다고 한다. 각자 술을 각자 잔에 마신다. 명절에는 술잔 사이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지민씨 남매는 술 영재교육을 받은 술 천재들이다. “남동생 부부가 우리 집에 오면 와인을 다 마셔치운다.”(지민씨) “형님은 음식뿐만 아니라 잔까지 꼭 챙겨준다.”(선은씨) 덕담치고는 내용이 범상치 않다.

자꾸 눈길이 주현씨가 따르는 황금빛 맥주로 간다. 침이 고인다. 맥주 거품처럼 뭔가가 속에서 끓어오른다. ‘참아야 한다’ 다짐을 한다. 기사 마감을 앞두고 주말 음주는 최악이니까.

고풍스러운 양은 막걸리잔에 막걸리를 마시면 뭐가 다를까? 세민씨가 “입술에 닿는 촉감이 좋다. 막걸리는 역시 토속적인 양은잔에 마셔야 풍미가 산다”고 말한다. “어이가 없었다. 남편(세민씨)이 주말 혼자 장 보러 갔다 오더니 이걸 사와 몰래 찬장에 숨겼다. 그냥 집에 있는 그릇에 마시면 되는데 굳이 이 잔에 마셔야 하나 싶었다.” 선은씨는 그날 양은 막걸리잔으로 함께 술을 마시고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달라 주방이 데이트할 때 다닌 주점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주현씨는 입담 좋은 학원 강사다. 애주가로서 일상을 즐겁게 보낸 것이 인기 강사가 된 비결이라고 한다. 제집처럼 드나들던 단골 술집에 가면 으레 잔을 살피고 마음에 들면 주인을 조른다. 평소 술값을 엄청 쓰니 친구가 된 주인도 기분 좋게 내준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잔만도 60여 가지다. 주현씨 아내 성은씨는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갔다. 하지만 그 잔에 따라 마시니 맛의 차이가 느껴졌다. 향도 다르다”고 말한다. 살림꾼답게(?) 대형마트에서 잔을 끼워주는 맥주는 꼭 구입한다. 성은씨는 “신제품이 들어왔나 전화를 하면 마트 담당자가 목소리를 알아본다”고 하면서 “소장하고 있는 잔들을 블로그에 올리면 친구들의 ‘좋아요’ 댓글이 쇄도해 그 재미도 무시 못한다”고 말한다. 주현씨는 술을 잔에 붓기 바쁘다. ‘필스너 우어크벨(우르켈)’ 등 가져온 20여 가지 맥주를 모양이 다른 잔에 부어 세민씨에게 건네면서 한껏 설명을 한다. 이들이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동안 지민씨는 얼음을 넣은 양주잔에 계속 매실원주를 넣는다. “매실원주는 본래 작은 소주잔에 마셔야 풍미가 더 사는데 차가운 청량감을 더 좋아해서 이렇게 마신다.”

한참 물이 오르는 술상에서 오묘한 눈빛이 오고 간다. 뭔가 작당을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윽고 주현씨가 말한다. “이 크래프트 비어는 최근에 수입된 맥주다. 이것은 꼭 마셔봐야 한다.” 결국 쭉 뻗어 내미는 그의 보드라운 손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들었다. ‘그래, 딱 한 잔만이다!’ 쌉싸름한 풍미와 산미가 적당히 녹아 있는 맛이다. 벌컥! 목표물 포획에 성공한 가족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핀다. 두 잔, 세 잔! 전용 잔에서 탐스럽게 빛나는 거품이 계속해 목으로 넘어간다. 이때 세민씨가 색다른 술을 건네줬다. “장모님이 직접 제조하셨는데 맛 평가를 해 달라. 약재를 60여 가지 넣었다.” 한 잔 머금자 나무 껍데기를 뜯어 끓인 듯한 맛이 풍긴다. 취기에 조언 한마디 했다. “단맛이 너무 적다. 약재를 좀 빼거나 아니면 넣은 약재의 배율을 바꾸면 좋겠다.”

쇠고기와 해산물 샤브샤브, 삼겹살이 안주다. 90년대 음악이 흐른다. 남자들은 서로 잔을 씻는다고 난리법석이다. 씻은 잔은 또 술상에 나타난다. 밤 11시, 잔 구경만 하고 나오겠다는 결심은 싸락눈처럼 사라졌다. 알코올 도수 6도 이상인 크래프트 비어를 몇 잔이나 마시고는 흔들거리면서 그 집을 나왔다. 그 집의 무용담이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다. 그들은 기자가 나온 뒤에도 새벽 2시까지 맥주 20여병, 소주 3병, 막걸리 2병과 와인 3병을 비웠다는 후기다.

이들은 “‘그 잔에 마시는 그 술’이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입 모아 말했다. 술의 낭만을 오롯이 즐기는 법은 여러 가지다. 마음이 맞는 이들과의 한잔도 방법이지만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멋진 잔을 갖추는 것도 비결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위 내용은 2015년 3월 5일자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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