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일찍 일어난 막내 수현이랑 놀아주고 있으니 신영이가 잠에서 깼다.
신영이에게 어제 일에 대해 얘기했다.
"신영아, 어제 아빠한테 혼날 때 신영이가 울었잖아.
아빠가 생각해보니까 신영이가 선생님 드릴 카네이션 만들다가 늦었는데,
아빠가 신영이 얘긴 안 듣고 늦게 들어온 것만 가지고 혼내서 울었던 거야?"
"응."
"그러면 신영이가 많이 속상하고, 억울했겠다.
아빠한테 제대로 말도 못하고 혼났으니...
아빠가 신영이 잠들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신영이한테 미안했어. 그래서 지금 말하는 거야.
혹시 아빠한테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응. 없어."
"기분도 괜찮아?"
"어, 괜찮아."
"그래. 지금은 기분이 괜찮구나."
신영이 표정을 보니 다행히 기분이 크게 상했던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말하고 나니 나도 마음이 놓인다.
요즘 분유를 끊고 이유식과 반찬을 먹고 있는 수현이는
건강한 똥을 하루에 세 번씩 싼다.
어제 저녁에 그 바쁜 와중에도 똥을 두 번이나, 아침 것까지 합하면 세 번이나 싸더니
오늘 아침에는 유치원 나가기 직전에 똥을 누었다.
참 타이밍도 절묘하다.
부랴부랴 화장실에 안고 가서 엉덩이를 닦아서 다시 옷을 입혔다.
스승의 날이라 어제 아이들과 장보면서 선생님들께 드릴 12개 들이 과일 음료수를 샀다.
작년 겨울부터 유치원 선생님들께서
유치원 끝난 뒤 퇴근길에 신영이를 데려다 주셨다.
올해 선율이까지 입학시키면서 '올해는 제가 데리러 나올게요.' 해도
한사코 말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아버님.
수현이도 어린데, 데리고 나오려면 춥고 감기 걸려요.
저희가 어차피 퇴근하는 길이니까 데리고 갈게요. 걱정 마세요."
유치원에서 4분 정도 거리의 시골 주택에 살고 있어서
아파트처럼 집 앞에서 버스에 태워 보내지 않고, 아이들이 걸어서 유치원에 오가다보니
아직 어린 막내를 데리고 나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그렇게 덜어주셨다.
작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이제는 날이 더이상 춥지도 않고,
오히려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을 데려다 주시기에는 날씨가 더워진 것 같아
선생님께 '오늘부터는 제가 데리러 올게요.' 하고 말씀드렸다.
"괜찮으시겠어요?"
"예. 그럼요. 이제 수현이도 걸을 만큼 다 컸잖아요.
그동안 작년 겨울부터 계속 도와주셔서 수현이를 이만큼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옆에서 내 얘길 듣고 계시던 하모니 선생님께서
"신영이 아버지가 대단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도 도와드린 거죠."하고 말씀하신다.
(아이 셋 데리고 육아휴직한 걸 말씀하시는 거다.)
"아이 뭘요. 정말 감사해요."하고 말씀드리는데,
눈물이 나려 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오늘 오후부터는 제가 데리러 올게요.
그리고 이건 선생님들 더우신데 드시라고 음료수 좀 가져왔어요."
"에이, 유치원에 음료수 많아요. 뭘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그래도 두고 드세요. 그리고 신영이도 선생님들께 카네이션 만들어 왔어요.
신영아, 선생님께 드려."
신영이가 가방에서 어제 만든 카네이션을 꺼내어 선생님들께 드렸다.
"우와, 신영아, 이건 나팔꽃 같고, 이건 카네이션이네. 고마워."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수현이 유모차를 밀고 집으로 왔다.
돌아오는 동안 마음이 찡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자 선율이가 유아 변기에 똥을 누러 앉았다.
거실에서 아장아장 걸으며 놀던 수현이도 선 채로 끄응 힘을 주기 시작한다.
신영이는 거실 미끄럼틀에서 놀고 있었는데,
신영이까지 '아빠, 나 급해! 유아 변기에 누고 싶어.' 한다.
"선율이가 누고 있잖아. 넌 화장실로 가."
그러자 '아, 급해.'하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렇게 동시에 아이 셋이 똥을 누었다.
'나 원 참.
아이 셋을 데리고 있다 보니 셋이 동시에 똥을 누는 일도 생기는구나.'
분유 끊고 이유식에 반찬을 먹기 시작한 수현이는 어제 세 번,
오늘은 네 번째 똥이다.
잘 먹는 게 좋긴 한데, 똥 치우다 하루 다 간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을 하나씩 목욕시켰다.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이미 9시가 넘었다.
아이들은 다 재운 시간은 9시 50분. 아, 피곤하다.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셋째 날.
셋째 날은 별일 없이 지나간다 싶었다.
그런데 오후 3시쯤 유치원에서 신영이가 열이 난다고 전화가 왔다.
해열제를 먹였다고 한다.
잠시 후 3시 반 쯤엔 수현이마저 열이 났다.
신영이와 선율이가 유치원에서 온 뒤 아이 셋을 데리고 소아과에 갔다.
약국에서 약을 짓는 동안
아내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학교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약을 지은 뒤 아내를 태우러 학교 근처로 갔다.
차에 탄 아내의 목소리가 쉬어 있다.
나와 아이들의 안부를 간단히 물은 아내는 수학여행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신영이와 선율이는 피곤했는지 집에 오는 길에 잠이 들었다.
수학여행의 피로로 지친 아내는 집에 온 뒤
힘들다며 거실 바닥에 드러눕는다.
'3일 간 쌓인 피로를 확 날려줄 한 마디는 못할 망정 '우는 아이 뺨 때리는' 말을 하다니...'
서운했다.
그래도 지금 서운한 감정만 가지고 입씨름하면 서로 피곤해질 게 뻔하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나도 피곤한데...
에고, 내 신세도 참.
애들 병원도 갔다오고, 아내 픽업까지 해온 내가 수현이 저녁 이유식 먹여야지, 뭐~"하고,
'내가'에 힘을 줘 말하며 우는 소리를 했다.
"미안해. 내가 수학여행 내내 잠을 거의 못 잤어.
학교에서도 같은 학년 선생님들이랑 얘기할 시간이 거의 없는 거, 당신도 알잖아.
그러다 보니 불침번도 서고, 이번 기회에 샘들하고 얘기를 늦게까지 했거든."
"그래. 늦게 잤으니 피곤하겠다.
그래도 3일간 아이 셋 데리고 혼자 지낸 남편에게
'나 피곤하니 못 도와주는 거 이해해줘.'라는 말부터 꺼내는 건
좀 심한 거 아냐?"
"정말 미안. 좀만 쉬었다가 나도 기운내볼게."
아내와 얘길 나누면서 수현이 이유식과 감기약을 먹였다.
저녁을 먹고 난 수현이는 잠시 후 똥을 쌌다. 3일 동안 아홉 번째다.
"여보, 수현이 똥은 자기가 치워줄 수 있겠어?"
"미안. 나 지금은 좀 힘든데."
"알았어. 내가 한다, 내가 해."
3일 간 아내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지내다 보니
아내가 돌아오면 당연히 가사와 육아 일을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내는 아내대로 사정이 있었지만 내가 가장 서운했던 건
집안일을 같이 해주지 않은 게 아니었다.
물론 돌아온 뒤 집안일을 나눠서 함께 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아내가 3일간 고생한 내 심정을 충분히 읽어주기는커녕
자기 여행 이야기와 자기 힘든 상황에 대해서 더 먼저, 더 많이 말하니 그게 더 서운했다.
저녁 먹고 놀던 수현이까지 재운 뒤 아내와 이런 심정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눴다.
약간의 휴식으로 조금 기운을 차린데다
남편의 서운함이 크다는 걸 알아차린 아내는 내 심정을 적극적으로 알아주었고,
나의 서운함도 서서히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