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해독자

가족 조회수 8245 추천수 0 2013.10.21 14:17:58
18개월 된 막내 수현이가 요즘 좋아하는 놀이가 있다.
바로 그림책을 읽는 것이다. 
보드북을 읽으면서 까꿍 놀이나 코코코 놀이를 하기도 하고,
팝업책을 이리저리 만지며 까르르 웃기도 한다.
특히 그림책에 동물이 나오면 동물 소리를 흉내 낸다.
물론 남들이 들으면 수현이가 내는 소리가 다 그게 그거인 걸로 생각하겠지만,
책을 같이 보는 내가 듣기엔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래서 호랑이인지,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어우어우'라고 말하는 건 '어흥어흥'이다.
'아오아오'는 '야옹야옹'이고, '어어'하며 짧게 말하는 건 '멍멍' 소리를 내는 거다.
그 중에 '어우어우(어흥어흥)'와 '어어(멍멍)'의 차이를 알아채기는 좀처럼 쉽지 않지만,
좀 더 짧게 발음하는 쪽이 '멍멍' 소리다.
수현이에게 그림책 읽어주기.jpg

수현이가 조금씩 할 줄 아는 게 많아지면서 
말과 몸짓으로 여러 가지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알아듣기 쉬운 신호도 있고, 
때론 암호라 생각될 만큼 그 뜻을 알아채기 어려운 것도 있다.
'우' 하며 손가락으로 주방을 가리키는 건 쉬운 편에 속한다.
물을 달라는 얘기다.
외출하고 돌아온 뒤 옷을  갈아 입혀줄 때 발을 들며 '어, 어'하는 건
양말을 벗겨 달라는 뜻이다.

가끔 수현이가 바닥에 드러누울 때도 있다.
만지고 싶은 걸 못 만지게 하거나
손에 쥐어준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벌러덩 드러눕곤 한다.
그런데 때론 드러눕는 이유를 정확히 알아채기 어려울 때가 있다.
뭔가 불만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땐 참 답답하다.
서툰 암호 해독자가 고난도 암호를 만나 쩔쩔 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고난도 암호의 최고봉은 역시 젖먹이 때의 울음이 아닌가 한다.
특히 첫째가 젖먹이였을 때 울면
배가 고픈 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오줌을 눈 건지, 
아니면 그냥 뱃속에서 하던 행동이 가끔 나타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아내와 함께 마음 졸였던 일이 참 많았다.

그나마 아이 셋을 키우는 동안 암호 해독 능력도 조금씩 커져서
막내가 젖먹이였을 때는 첫째 때에 비해 불안해 하거나 마음 졸이는 일이 많이 줄었다.
물론 그건 아이의 울음이라는 암호를 해독하는 어떤 방법이나 기술을 찾아서라기보다는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이 그만큼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간만큼 아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아이가 보내는 신호에 반응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막내가 돌이 되었을 때 
'아기가 울 때 왜 우는지 아는 방법이 있어요?'라는 동서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건 오랫동안 아이랑 지내고, 교감하면서 경험으로 짐작하게 되는 거라 생각해요."


고난도 암호는 둘째 선율이도 갖고 있다.
네 살인 선율이는 원하는 걸 다 말로 할 수 있지만, 
선율이의 말 중에는 아직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이 있다.

얼마 전에 선율이가 볼 텐트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아빠: "선율아, 무슨 놀이해?"
선율: "처차 놀이."
아빠: "첫 차 놀이?"
선율: "아니."

'첫 차 놀이?'라고 되물으면서도 그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선율이가 아직 '첫 차'란 말을 모르고 있을 거니까.
'처차 놀이'가 뭘까, 궁리하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빠: "선율아, 첫 차 놀이가 뭐야? 방금 무슨 놀이라고 했어?"
선율: "처.차. 놀.이."

선율이는 정확하게 말해주려고 하나씩 끊어 말해주었다.
그런데도 모르겠다.
이럴 땐 미안하고, 난감하다.
'어떡하지? 또 묻긴 미안한데...'
그러다 문득 '혹시 천사 놀이인가?'하는 생각이 났다.
얼른 물었다.

아빠: "선율아, 천사 놀이 하는 거야?"
선율: "응."

'휴우, 다행이다. 맞았다.'
이와 비슷한 일이 종종 생긴다.
이번처럼 선율이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게 되는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끝까지 못 알아듣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정말 미안하고, 답답하다.

그런데 그때 해결사가 나타나곤 한다.
바로 첫째 신영이다.
신기하게도 신영이는 아내나 내가 못 알아듣는 선율이의 말을 99% 알아듣는다.
신영이야말로 성실하고, 탁월한 암호 해독자인 것이다.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선율이 말을 알아듣는 게 하도 신통해서
신영이에게 그 방법을 물은 적이 있다.
신영이의 대답은 이랬다.

"선율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돼."

'뭐, 대단한 것도 아니구만.'
그런데 대단한 것도 아닌 방법으로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신영이는 잘 알아듣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잘 들어보면 돼'라는 말 속에 많은 게 담겨 있는 걸 알겠다.
신영이는 나보다 선율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다.
게다가 신영이에게 선율이는 함께 놀아야 할 짝이다.
같이 놀려면 선율이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즉, 재미있게 놀고 싶은 신영이의 욕구는 선율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신영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 선율이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영이는 선율이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정성껏 듣는다.
'잘 들어보면 돼'라는 말 속에는 그런 간절함과 정성이 있었다.

아빠로서 아이에게 말하기만 잘 하지, 듣기는 충분히 못 하고 있다는
반성이 들 때가 있다.
아이의 말을 잘 듣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신영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의 존재가 좀 더 아이에게 의존하게 하자.'
선율이의 말을 못 알아들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내가 선율이에게 영향을 덜 받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아빠로서 내 삶이 '나'만 가지고 온전해질 수 없고,
아이들과 함께 할 때 온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싶다.
그러면 아이의 이야기를 보다 정성껏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이가 보내는 암호의 뜻을 알면서도 해독하기 귀찮을 때도 있다.
내가 여유가 없거나 지칠 땐 아이의 암호고, 뭐고, 다 성가시다.
글을 쓰는 지금,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생각해 보면,
그럴 땐 내 마음 속에서도 암호를 보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네 몸이 피곤하고 힘 들어하니 좀 쉬어.'
그때 내 마음이 보내는 '쉬고 싶다'는 암호와 아이가 보내는 암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 좋으련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도 한다.
그렇게 비틀거리다가 다시 일어나며 마음 먹는다.
'두 암호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다시 걸어보자.'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수
201 [가족] 육아하는 아빠의 벗, 라디오 imagefile [15] 박상민 2013-10-28 15392
200 [가족] 며늘아가야 까라면 까라…아버님은 못말리는 파쇼 image 베이비트리 2013-10-28 7327
199 [가족] [토토로네 미국집] 어서오세요~ [2] pororo0308 2013-10-23 4590
» [가족] 암호 해독자 imagefile [6] 박상민 2013-10-21 8245
197 [가족] 아이들 어록 생각나는대로 [6] 양선아 2013-10-16 4948
196 [가족] 칭찬할까, 말까? imagefile [8] 박상민 2013-10-14 7596
195 [가족]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유혹 imagefile [1] 박상민 2013-09-30 12186
194 [가족] 반전의 묘미~ 여섯 살 아이와의 대화 imagefile [2] 꿈꾸는식물 2013-09-30 6134
193 [가족] 35년째 지긋지긋하단다…딸아 넌 그렇게 살지 마라 image 베이비트리 2013-09-30 6355
192 [가족] 우리집 명절 풍경 imagefile [10] 박상민 2013-09-23 11986
191 [가족] 돌보는 존재인 부모 자신을 보살피기 imagefile [7] 박상민 2013-09-16 7884
190 [가족] 뛰는 엄마 위에 나는 6살 딸래미! imagefile [10] 나일맘 2013-09-13 6049
189 [가족] 학교 벗어나 부모의 눈으로 교사를 보니 imagefile [4] 박상민 2013-09-09 6030
188 [가족] 당신에게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image 베이비트리 2013-09-09 4869
187 [가족] 아이의 자신감을 바라보는 두 마음 imagefile [8] 박상민 2013-09-02 7967
186 [가족] "이게 다 수현이 때문이다." imagefile [4] 박상민 2013-08-26 5388
185 [가족] 새언니랑 연락 안해요 관심을 꺼버렸으니까 image 베이비트리 2013-08-26 5604
184 [가족] 여름휴가 이야기(2)- 아빠 어디가? 베트남 다낭 imagefile [8] 푸르메 2013-08-23 6649
183 [가족] 서울내기 부부, 세 아이와 시골집에서 찾아낸 각자의 놀이터 image 베이비트리 2013-08-22 5379
182 [가족] "엄마! 나, 너무 신나. 떨리고 긴장돼. 꿈 같아." imagefile [3] 박상민 2013-08-20 9655

인기글

최신댓글

Q.아기기 눈을깜박여요

안녕하세요아기눈으로인해 상담남깁니다20일후면 8개월이 되는 아기입니다점점 나아지겠지 하고 있었는데 8개월인 지금까...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