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명절 풍경

가족 조회수 11983 추천수 0 2013.09.23 16:00:52
우리나라의 명절 모습은 어느 집이나 비슷할 것이다.
자식들이 부모님들을 찾아 고향 집으로 가고, 부모님들은 여러 종류의 음식을 장만하고,
추석 아침엔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온 뒤 
자식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땐 부모님들이 온갖 과일과 음식들을 바리바리 챙겨주시는...
요즘엔 부모님들이 자식 집으로 올라오거나 가족 여행을 가는 경우도 늘어가고 있다고 하니
명절 풍속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신문을 보니 추석 날짜를 양력의 특정한 날로 바꾸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전통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우리 가족의 명절 풍경을 그려보려 한다.
여느 집들의 명절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인 내가 육아휴직 중이니 다른 집과 아주 같은 순 없을 것이다.
그 모습을 기록해두는 건 역사교사인 내게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추석 사흘 전.
올 추석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으로 가지 않고, 부모님께서 우리집으로 오시기로 했다.
최근 여동생네 가족이 우리집 가까이로 이사를 와서 동생네 새집을 구경할 겸, 명절도 쇨 겸 
부모님께서 올라오시기로 한 것이다.
처가의 장인, 장모님과 처제네 가족도 추석 오후에 우리집에 모이기로 했다.
처가는 인테리어 공사를 하느라 집에서 명절를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집에서 양쪽 부모님들을 모시게 되었다.

추석 3일 전에 아내가 물었다.
아내: "추석 때 음식 장만할 거야?"
나: "그럼. 추석인데. 부모님들이 우리집으로 오시니까 우리가 장만해야지."
난 당연한 걸 왜 묻나 싶었는데, 다음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아내는 명절을 앞두고 양쪽 부모님들을 우리 집에서 모셔야 하는 상황에서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명절 음식을 준비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직장일로 바쁜 자기가 나서서 하진 못하고,
그렇다고 육아휴직 중인 남편에게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을 선뜻 하기는 미안했던 것 같다.
그런 부담감과 미안함 때문에 내게 음식을 장만할 건지 물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음식을 장만한다고 하고, 아내 퇴근 때 재료를 사오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내심 안도하고, 내게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나: "추석 때 부모님들이 우리집으로 오시기로 했는데, 내가 음식 준비 안 할 사람으로 보여?"
아내: "아니."


추석 이틀 전.
마당 텃밭과 집 앞 가로수길에 잡초가 무성한 걸 오래도록 방치했더니 밀림이 따로 없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첫째와 둘째에게 집안에서 막내 동생과 놀아주도록 부탁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장갑을 끼고, 낫과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았다.
풀들이 하도 많이 자란 탓에 뽑아서 모아둔 곳이 수북하게 솟아올랐다.
그런데 동네에서 아이들이 모여 노는 소리가 나자 첫째와 둘째 아이가 놀러 나가겠다고 문을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두 살 난 막내는 마당에 혼자 놀게 두고 여기저기에 난 풀을 뽑았다.
그사이 막내는 떨어진 방울토마토를 주워먹기도 하고, 자갈을 들고 놀기도 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일을 하고 나니 봐줄 수 있을 정도로는 정리가 되었다.
'그래. 부모님들도 오시고, 동네에 손님들도 많이 올텐데, 이 정도라도 정리는 되어야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추석 하루 전.
준비하려고 한 음식은 모두 세 가지. 쇠고기무국, 꼬치전, 돼지갈비찜이다.
쇠고기무국은 아침을 준비하면서 끓였다.
돼지갈비찜은 내가 준비하고, 꼬치전은 아이들과 같이 하기로 했다.
갈비찜 준비를 하는 걸 본 아내가 말했다.
아내: "동생(처제)이 형부의 음식에 대해 기대 많이 하고 있다고 하던데?"
나: "기대까지 하면 부담되는데?" 
그렇게 대답했지만 맛있게 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필살 갈비 재료 두 가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양파와 표고버섯이다.
믹서가 고장 나서 양파를 강판에 갈아 갈비양념에 넣고, 표고버섯 우려낸 물도 넣었다.
지켜보던 아내가 '열대과일 통조림도 넣지 그러냐'고 했지만, 넣지 않기로 했다.
경험상 그렇게 하면 단 맛이 너무 강해져 오히려 입맛을 버린다.

꼬치전을 함께 만들기 위해 신영이, 선율이는 어린이 앞치마를 입었다.
아이들에게 계란 휘젓는 것과 꼬치 끼우는 걸 같이 하게 했다.
큰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놀이 차원에서 경험하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추석-꼬치전.jpg
그런데 막상 꼬치를 꽂아보니 준비한 재료가 너무 적었다.
아내는 '여러 식구가 모일 걸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
엄마에게 전화해보더니 '다행히 어머니께서 몇 가지 전과 음식들을 준비해서 가져오시기로 했다'며 안심했다.
부침가루를 묻히고 계란옷 입히는 것도 아이들이 해보게 했다.
지글지글 갓 부친 꼬치전을 아내와 아이들이 먹어보더니 맛있다 한다.
나도 먹어보니 아주 맛있다.


오후가 되어 부모님과 여동생이 도착했다.
신영이, 선율이는 예쁜 옷들을 입고와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그동안 만들고 꾸미고 그린 여러 그림과 물건들을 보여드리기도 한다.


추석날.
큰집이 아니어서 차례는 지내지 않으니 전날 준비한 음식들로 푸짐한 아침상을 차려 여유있게 식사를 했다.
(우리 집안은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번 시제 때만 온 친척들이 다 모이고, 명절은 가족 단위로 보내고 있다.)
식사 후에는 마당에서 자란 고구마 줄기를 뜯어다 다듬었다.
추석-고구마 줄기 다듬기.jpg
나, 우리 아빠, 엄마, 이렇게 셋이 모여 앉아 고구마 줄기를 다듬고, 막내 수현이는 놀다가 내 품에 들어와 앉았다.
신영이와 선율이는 막내 고모와 놀고, 아내는 설거지를 맡았다.


오후엔 장인, 장모님, 그리고 처제와 동서, 5개월 된 쌍둥이 조카 둘, 이렇게 처가 식구들이 왔다.
점심을 드시면서 양쪽 부모님들은 덕담을 나누셨다.
형부의 음식을 기대했다던 처제가 갈비찜과 전 모두 맛있다고 말하니 흐뭇했다.
식사 후에 장인, 장모님은 우리 부모님께 고구마 농사에 대해 물으시고,
우리 부모님은 장인 어른의 한우 사육에 대해 물으시며 시골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두 달 만에 본 쌍둥이 조카들은 어느새 훌쩍 커서 엎치기와 방향 틀기를 했다.
'벌써 저만큼 자랐나' 싶어 신통하고, 기특했다.


저녁 땐 시댁에서 돌아온 둘째 여동생네 집으로 갔다.
새 집 구경을 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가족 회의를 했다.
막내 동생의 결혼 문제에 대해 온 식구가 둘러앉아 생각을 나누었다.



추석 다음날.
부모님, 둘째 동생네 가족, 막내 동생과 함께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보러 갔다.
명절 연휴 기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멋지고 아름다운 공예 작품들이 많았는데, 막내 수현이가 감기 기운이 있어 자꾸 안기려 해서
다니기가 쉽진 않았다.
추석-연초제조창 낙서.jpg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곳은 옛 연초제조창(정부가 담배를 전매할 때의 담배 공장)이다. 전시장으로 바뀐 연초제조창 한쪽 벽에 이런 재미있는 낙서가 붙어 있었다.)

그 뒤에는 야외 체험 부스로 갔다.
초콜렛 만들기, 아이스크림 만들기, 비즈 장식품 만들기, 목공 같은 여러 부스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둘러보게 한 뒤 한 가지만 골라서 하자고 했더니 
왔다갔다 하며 둘러보면서 뭘 할지 고민한다.
초콜렛 만들기와 비즈 팔찌 만들기 두 개를 놓고 고민하는 눈치다.
그런데 초콜렛 부스의 아저씨가 웨하스에 초콜렛을 발라 먹어보라며 아이들 손에 쥐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아내와 나는 '게임 끝이야. 마지막 펀치가 날아왔어.', '저 아저씨가 장사를 아네.'하며 웃었다.
결국 아이들은 초콜렛 만들기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초콜렛 만들기가 끝난 뒤 아내가 비즈 팔찌 만들기를 해보고 싶다며 아이들과 함께 비즈 부스로 갔다.
아이들은 구슬 꿰는 데 완전 몰입했고, 다 만든 팔찌를 손목에 차고 엄청 좋아했다.
추석-공예비엔날레 비즈 팔찌.jpg


양쪽 부모님을 모시고 명절을 우리집에서 지내보니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온 가족이 모여 음식도 만들고, 가족회의도 하고, 비엔날레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음식 장만도 부모님과 아들 가족이 나눠서 준비하니 부담도 안 되고, 부모님께 죄송스럽지도 않았다.
내년에 내가 복직하면 우리집의 명절 모습이 달라질까?
아마 올해와 비슷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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