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어느 날이었다. 
저녁을 먹던 아내가 마늘쫑 조림이 상한 것 같다고 했다.
'날이 더워서 냉장고에 있어도 음식이 상하나 보다'하고, 음식을 치웠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을 먹는데, 가지 나물도 맛이 갔다.
이상하다 싶어 냉장고를 살폈다.
보통 2도에 맞춰져 있던 냉장실 온도가 5도로 되어 있었다.
순간, 며칠 전부터 수현이가 냉장고 앞으로 의자를 밀고 올라가서 
온도 조절 단추를 '삐-삐-' 누르고 놀던 게 생각났다.
'잠금'과 '잠금 해제'만 누르는 줄 알고 내버려두었는데,
'잠금 해제'한 뒤 온도 조절 단추까지 눌렀던 것이다.


7월에는 아내의 안경이 없어지기도 했다.
낮잠 자고 일어난 아내가 안경이 없어졌다며 찾고 있길래
'당신 자는 동안 수납장 위에 있는 걸 봤으니 잘 찾아보라'고 했다.
아내는 '다시 가봐도 없다'며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도 안경이 보이지 않는지 걱정하듯 말했다.
"난 난시가 심해서 그 안경 없으면 다시 주문해야 하는데, 그러면 한참 걸리는데..."
보다 못한 나와 신영이도 찾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안경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결국 예전 안경을 찾아 쓰고, '안 나오면 새로 맞춰야지' 하며 
절반은 포기한 상태로 주방에 서 있었다.
한참을 찾아도 나오지 않자 아내와 나는 안경 찾기를 거의 포기하고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내가 '어, 수현이가 안경 갖고 있다.'하며 안방의 수현이를 가리켰다.
얼른 뛰어 가서 보니 수현이 손에 안경이 들려 있었다.
'수현아, 이거 어디 있었어?'하며 물어보았지만, 
아직 말 못하는 수현이(17개월)가 대답할 리 없었다.
그런데 수현이 옆에 장난감 경찰차가 있는 게 보였다.
아마 수현이가 안경을 장난감 경찰차 앞좌석에 넣어두었다가 꺼낸 것 같았다.
아내는 안경을 다시 찾은 걸 기뻐하며 '수현이가 결자해지했네.'하며 웃었다.


몇 달 전에는 김치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 맛이 푹 시어져 있던 일도 있었다.
'희한한 일이네'하며 김치 냉장고를 살펴보고 전원이 꺼져 있는 걸 발견했다.
멀티탭의 빨간 단추가 꺼져 있었던 것이다.
며칠이나 꺼진 채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싱싱한 김치 먹기는 영 물 건너 가버렸다.
이것도 수현이의 소행이라 추정하고 있다.


아내의 신용 카드가 없어져 재발급 받은 일도 있었다.
그리고 생김새와 크기가 꼭 구슬 같은, 마치 토끼 똥처럼 생긴 똥이 
누나들 책상 위나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우리 집에서 이런 희한한 일들이 일어났던 건 다 수현이 때문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일곱 살인 신영이가 '때문이다'라는 말을 어법에 맞지 않게 쓴 적이 있다.
신영이가 아파서 유치원에 가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유치원 선생님께서 동생 선율이가 집에 올 때 '언니 주라'며 간식을 챙겨주셨다.
동생에게서 간식을 받은 신영이가 선율이에게 같이 먹자며 이렇게 말했다.
신영: "선율아, 너 이 간식 먹는 거, 나 때문이야. 그러니까 언니한테 '고마워' 해."
선율: "언니, 고마워."
자매가 그런 대화를 나누며 간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나는
신영이에게 말을 고쳐주었다.
"신영아, 그럴 때는 '때문이야'가 아니라 '덕분이야'라고 하는 거야."

크기변환_이유식 먹는 모습.JPG
앞에서 수현이 때문에 일어난 황당한 일들을 얘기했는데,
생각해보면, 신영이의 어법으로 '수현이 때문이야'라고 할 만한 일이 참 많다.
안아주기만 해도 환하게 웃어주어 덩달아 내가 웃을 수 있는 것도,
졸릴 때마다 내 품에 안기거나 내 손을 잡고 잠이 들곤 해서 
아빠인 내가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것도 다 수현이 '때문이다'.
음식을 주면 얼굴에 밥풀을 잔뜩 묻혀 가며 양손으로 집어 먹어
내가 흐뭇하고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선물 같은 존재'라는 말을 가슴으로 알 수 있었던 것도
다 수현이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수현아! 
다 네 덕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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