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일요일 아침,

아이들 재우고 읽을까 망설였던

박영숙의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를 얼른 펼쳤다.

앞에서 읽었던 '꿈꿀 권리'에서 부족해보였던

도서관의 일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옅볼 수 있었다.


오빠들이 야구시합을 벌이면 공을 주워주고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으면서 편을 가를 때 깍두기를 두는 법도 줄곧 이기면 한 번 봐주는 너그러움도 배웠다. (...) 명절이면 대문에 매단 우유주머니랑 신문함에 양말 한 켤레씩 넣어두는 엄마를 보면서 좋은 날 둘레 사람들과 정을 나눌 줄도 알게 되었다. - 박영숙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p.34


갑자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이웃과 어떻게 지내는지, 서로 나누려는 모습... 그랬다.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는 '교육은 뒤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이들은 눈 앞에 놓고 가르치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뒤에서 따라 하며 배운다는 말이다. - 박영숙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p.33


순간 내가 아이들 앞에서 한 행동이나 말들이 수많은 필름이 되어 지나갔다.

사람들과 나눠 먹으려고 딸기를 씻어 담아갔던 일부터

놀이모임에 다녀와서 아이에게 힘든데도 너희들 놀게하려고

간 건데 왜 엄마 맘은 몰라주냐며 소리쳤던 일까지.

어머나, 필름이 지나갈 때마다 이건 잘했었구나,

그건 아니었어라며 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내가 진실되게 매 순간을 살았나,

아이들과 함께 할 때나 아이들과 이야기 나눌 때

속마음과 다르게 행동한 내 모습이 있었을거라는 생각에 이르니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전날 읽었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권 연산군일기 내용이 떠올랐다.

 7권 앞부분에 '경험의 정치', '연산의 경험'이 나온다.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이 정치를 하면서 이를 보고 자란 

후대의 임금들은 어떻게 정치를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이 '이것이다'라고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먼저 임금을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식은 어떤 정치를 펼쳤는지를 간략하게 보여준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과 세조,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아버지는 성군이었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

성종은 성군으로 아들 연산은 폭군으로 극과 극일수도 있다.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아니면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서로 상반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아버지 성종의 정치를 지켜보며 받은 충격 또한 컸다. 아버지는 그 동안 책을 통해 보았던 군주들의 모습과 많이 달라보였다. '별 것 아닌 일로 사사건건 대간의 공격을 받고' 쩔쩔매며 해명하시다가 결국엔 두 손을 들고 마시지. 그런 다음엔 스트레스로 괴로워하시고.

-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7권 연산군일기' p.25


연산군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는 않았으니 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연산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연산과 성종이 진심으로 터놓고 이야기 나눈 적이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부모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이 자녀에게 전달되는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의 길이보다 시간의 농도? 진하기가 아닐까.

짧은 순간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부모의 눈빛이나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온몸으로 함께 놀아주는 부모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않을까.    

'응답하라1994'에 등장하는 정우(극중 김재준)의 병원씬 중에

곧 죽음을 앞 둔 어린 두 아이의 엄마가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했을 때 7살 때 엄마를 여윈 동기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동기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 자신은 어렸지만  

자신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가슴에 남아있다고.

아... 생각에 꼬리를 물수록 아이들에게 미안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다툴 때면 레이져를 쏘는 듯한 눈빛으로 보기도 했고,

때론 아이들의 마음을 후비는 말도 내뱉었는데...


전날 아이들과 읽었던 '아나톨의 작은 냄비' 내용도 떠올랐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부모일수도 스승일수도 친구, 그 누구일수도 있다.  

아이들마다의 다름을 인정하고 아이 속의 능력과 잠재력을 찾아주거나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이는 행복하지 않을까.

아이만 그렇겠는가. 누구나가 그럴 것이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단순히 기분 좋은 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 동안 읽었던 책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꿈틀댔다.

'꿈꿀 권리'에 모리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온다.

그 때만 해도 모리를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책일까 궁금해서 바로 읽을 목록에 집어넣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미치와 모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었다.


어른들의 꾸며진 모습, 거짓된 모습을 아이들도 안다.

큰아이에게 "새 담임 선생님 어떠셔?"라고 물었더니

"작년 담임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잘 안들어주셨는데

이번 선생님은 내 말을 들어주셔."라는 거다.

작년에 작은아이 유치원 선생님은 좋고 훌륭한 분이셨다.

이야기를 나눠본 엄마들은 모두 아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상담을 하고와서는 선생님이 아이를 잘 파악하고 계시다며

내년에도 담임 맡으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다른 곳으로 전근가셨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나 아이도 엄마도 행복했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우리 아이를 알아봐주는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으면.

하는 바램을 학부모라면 누구나 하겠지.

한 사람으로서 난 아이들을 알아봐주는 사람이었나?

나만의 안경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건 아니었나?

아이들에게 보인 나의 말과 행동은 얼마나 진실되었을까?

가슴이 갑자기 휑해지더니 그 무언가로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하든, 언제나 진실되게 살아야겠구나.

계산적인 삶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삶을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진하게  밀려들었다.


책을 읽지 않을 권리, 건너 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마음대로 상상하며 빠져들 권리,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소리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박영숙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p. 59에 인용된

다니엘 페나크의 '책 읽기에 대한 열 가지 권리'이다.

같이 모임을 하는 엄마들 내에서 한 동안 뜸했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책읽기 시간을 가져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충분히 재밌는 책모임을 아이들과 함께 할 수도 있을텐데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란 걱정이 불쑥 들었다.

그 날따라 피곤하여 엄마들이 준비하는 게 귀찮고 하기 싫은 생각이 더 컸나보다.

그래서일까 책 읽기의 열 가지 권리 중

'책을 읽지 않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가 더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것도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도

오롯이 아이들이 하고 싶을 때 하고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

작년에 읽었던 편해문의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란 책과 함께

박영숙의 도서관 이야기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통한다.

게다가 도서관을 매개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은

더불어 사는 마을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빌려서 읽고 싶은 책에서 사고 싶은 책으로 다가오는 책이 늘었다.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책을 만나 기쁘다.

아이를 키우는 또래 엄마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만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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