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현상이 관념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난 학창시절 내내 번호가 키순으로 1번이었다. 그래서 높은 데 있는 것을 꺼내기라도 하려면 의자부터 끌어와야 하고, 그렇게 올라선 의자 위는 공기부터가 다르고 내려다 본 세상은 항상 별천지였다. 남들보다 흙냄새를 많이 맡는 자연친화적 기럭지 때문에 남들은 쉽게 생각하는 일도 내겐 대운하에 버금가는 노역으로 다가와서 차마 시작할 엄두도 못 내는 게 많았다.
  그러나 모성은 위대하다지 않은가. 나는 천기저귀를 시작했다. 그리고 단 하루만에 뭔가 잘못 되어가는 것 같다는 의문이 일었다. 이틀째 되는 날, 마침 주공아파트에는 한파가 몰아닥쳤고, 관리사무소에서는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달라는 간곡한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단지(?) 아래층 이웃의 베란다에 물난리가 나면 안 된다는 공동선을 위해서 천기저귀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는 갸륵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천기저귀를 잊고 있었는데 베이비 트리에서 책이 왔다. 남편이 먼저 목차를 훑어보더니 한 곳을 펼쳐서 읽고는 ‘당신이 읽으면 벌벌 떨 책’이란다. 54쪽 「천기저귀가 더 좋다」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제목처럼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죄책감만 남았다. 그래서 다시 천기저귀를 시작했다.
  돈에는 의지가 있다. 나의 자연주의 육아 신념이 흔들리지 않도록 더욱 확고하게 부여잡기 위해 비싼 당공 기저귀도 샀다. 다시 시작한 천기저귀는 전처럼 힘들지 않았다. 전에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똥을 눴지만 지금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똥기저귀가 나오니 기저귀 빨래도 할 만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장마는 언제 오나... 천기저귀가 마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종이기저귀를 써야 할 텐데... 기름 값이 비싸니 곤로를 들여놓을 수도 없을 테고...
  누가 엄마는 강하다고 했나. 아기를 낳기 전에는 엄마가 되면 저절로 힘이 솟아나는 줄 알았다. 병뚜껑도 잘 따고, 무거운 것도 잘 들고, 빨래도 잘 짜고, 새벽에 눈이 딱 떠지고, 뚝딱뚝딱 요리도 잘하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강한 엄마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다. 나를 엄마의 길로 이끌어가는 추동력은 죄책감인 것 같다. 아기에게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닐까. 그리고 그 힘든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의 애틋하고 보람차며 사랑스런 기록이 신순화 님의 『두려움 없이 엄마 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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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사진이 참 예쁘다.

그런데 아기 아빠는 별로 안 좋아한다.

아빠와 아기가 닮은 곳은 머리카락 밖에 없는데 그 머리카락을 가렸기 때문인 것 같다.

발가락도 안 닮은 아빠의 몽니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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