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다고 ‘은행마을’ 잔치 안 하간디?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당살미(당산밑) 마을. 한 할머니가 수확한 고추를 널고 있다. 누런 들판 너머로 은행나무들이 보인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당살미(당산밑) 마을. 한 할머니가 수확한 고추를 널고 있다. 누런 들판 너머로 은행나무들이 보인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매거진 esc] 여행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3000그루로 감싸인 충남 보령 장현리…이번 주말 은행마을 축제
“은행? 올핸 소용읍슈. 알이 콩알만씩 한디 소용이 있남?”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당살미 마을’ 도로 옆에서 고추를 널어 말리던 할머니 두 분이 “생전 가야 비 한방울 안 오는” 지독한 가뭄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는 중이다. ‘소용없다’는 말은 작황이 좋지 않아 기대할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다.

“올핸 팥두 소용읍구, 들깨두 소용읍슈. 들깨는 한말두 못 했으니께. 작년엔 서너말은 했는디.” “기유(그래요)? 난 고추에 약을 혀야는디 안 해갖구 버러지가 죄 파먹었슈. 고추마다 버러지똥이 하나여.” “아유, 그래두 감은 차암 좋아유. 달구.”

130가구, 300여명의 주민이 장현1리는 3000그루나 되는 은행나무들로 감싸인, 이른바 ‘은행나무마을’(청라 은행마을)이다. 가을이면 장밭(긴밭·진밭)·당살미(당산밑)·솔안말·새논들 등 이름도 정겨운 마을마다 깔린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마을길 어디를 걷든지 은행알들이 발밑에 우두두둑 밟히는 마을이다(냄새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으니 마음 놓으시라). 하지만 올해는 몇달째 이어진 가뭄으로 은행잎들이 제 빛깔을 찾지 못한 곳이 많고, 농작물의 수확량도 대폭 줄어들었다. 장밭마을에 사는 60대 주민은 “벼농사는 저수지 물 끌어다 대면서 그런대로 됐는데, 밭작물은 대부분 망했다”고 했다.

수확한 은행더미에서 돌을 골라내고 있는 장현리 주민.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수확한 은행더미에서 돌을 골라내고 있는 장현리 주민.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쯧쯧, 죄 말라배틀어졌는데 무신 경치 볼 거나 있간디?” 주민들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은행마을의 가을 경관은 꽤 볼만했다. 은행나무 잎이 예년처럼 샛노란 빛깔로 물들지는 못했어도, 마을길과 담장 안팎에 늘어진 감나무들이며, 벼가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들판이 여행자의 발길을 가을 깊숙한 곳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 사이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의 표정도 마음씨도, 따사롭고 은근한 가을 햇살을 닮았다.

장현1리가 ‘은행마을’로 불리기 시작한 건 오래전 일이 아니다. 3000그루나 되는 은행나무들의 대부분은 1970년대에 심어진 것들이다. “은행나무 한 그루면 자식 하나 고등학교까지 가르칠 정도”로 은행 가격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은행값이 워낙 좋으니까 너두나두 심었지. 논·밭둑에도 심구 길옆에두 심구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겨.”(신재길 이장·57)

장현리 신경섭 가옥. 1843년에 지은 양반가옥이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장현리 신경섭 가옥. 1843년에 지은 양반가옥이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이전에도 은행나무 고목이 많기는 했다. 100~200년 이상 된 은행나무도 100여그루나 된다고 한다. 특히 19세기 말에 지어진 한옥 ‘신경섭 가옥’ 담장 안팎과 일부 마을길에는 지름 1m가 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고목들이 무성한 가지를 뻗고 우거져 있다.

예년처럼 샛노랗진 않아도
마을길·논길에 노란 은행잎 물결
주황빛 감나무·황금빛 들판
어르신 표정도 가을햇살 닮았다

팔순 할머니 두 분이 감을 따고 있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팔순 할머니 두 분이 감을 따고 있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새로 심은 나무들은 지름 30~40㎝가량이다. 은행나무 밑동에 돋아난 가지들을 꺾어다 두서없이 그때그때 옮겨 심었으니, 요즘의 마을 가꾸기 사업처럼 경관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따라서 길게 도열한 은행나무길이나, 한자리에 빽빽하게 우거진 은행나무숲을 생각하고 이 마을을 찾는다면 실망할 수 있다. 이 마을의 가을 정취는, 마을길에 논길에 자연스럽게 자라 올라 때로는 줄지어, 때론 한데 몰려 모습을 드러내는 은행나무들의 평범한 경관에서 번져온다. 여기에 잔잔한 단풍빛을 발하는 느티나무 고목들과 주황빛 감들을 무수히 매달고 늘어진 감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 가을빛을 진하게 키워준다.

이 마을에서 가장 돋보이는 가을 풍경은 신경섭 가옥 담장 안팎에 드리워져 있다. 대문은 잠겼지만 트인 담장을 통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이 고택 안마당엔 은행잎과 은행알들이 무수히 깔려 있다. 은행나무 단풍빛이 예년 같진 않다 해도, 화사한 가을 분위기는 다르지 않다.

장현리에선 은행 수확이 11월초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올해는 가뭄 탓에 은행알이 작게 영근데다 수확량도 예전 같지 않다. 해마다 100~150t의 은행을 수확해왔지만, 이번엔 수확을 포기하고 버려둔 나무들도 적지 않아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그렇다고 마을잔치를 안 하간디?” 신재길 이장은, 가뭄으로 주민들이 시름에 잠겨 있지만, 올해도 힘을 합해 마을 장현초등학교(폐교) 터에서 은행마을 축제를 벌일 계획이라고 했다. “은행알은 잘아도 맛은 더 좋고 영양가가 아주 똘똘 뭉쳤다니께. 은행막걸리도 잔뜩 담가놨슈.” 2012년 시작해 올해로 4회째가 되는 ‘청라 은행마을 축제’(10월31일~11월1일)다.

축제 때 장현리를 찾으면 지게로 은행가마니 져 나르기, 은행 공굴리기, 은행음식 만들기, 은행나무 목공예 등 체험행사를 즐길 수 있다. 은행나무 그늘 속에 자리잡은 정원이자 캠핑장인 ‘정촌 유기농원’엔 전통주막이 마련돼, 은행막걸리·약주, 은행전·은행국수 등을 맛볼 수 있다. 신 이장은 “내년엔 축제 말고도, 마을 영농법인에서 은행잎차·은행분말·발효액·식초 등 혈액순환에 좋은 다양한 식품을 개발해 마을 수익을 높여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장현리 귀학송(육소나무).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장현리 귀학송(육소나무).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장현리는 억새로 이름난 오서산 자락의 마을이다. 은행마을 여행길에 억새 산행(4개 코스, 왕복 4시간 안팎)을 즐기거나 오서산휴양림에 들어 쉬어갈 만하다. 오서산휴양림은 장현리에서 가까운 명대계곡의 국립 자연휴양림으로, 오서산 등산로 들머리 중 한 곳이다. 억새는 예년 같지 않다지만, 가을 산행객 발길은 평일에도 이어진다. 장현리에서 휴양림 가는 길에는 줄기가 여섯인 커다란 소나무, ‘귀학송’(육소나무)도 만날 수 있다.

명대계곡에서 흘러내린 물과 이웃마을인 황룡리 쪽 물길이 만나 이룬 저수지가 청라저수지(청천저수지)다. 오랜 가뭄으로 저수지 물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지만, 이 저수지 북쪽 물가 도로변에 볼거리가 있다. 장현리에서 황룡리와 옥계리를 지나 보령시내로 통하는, 저수지 북쪽 도로를 달리면 만나게 되는 화암서원이다. <토정비결>의 지은이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1517~1578)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토정은 보령에서 태어나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한 뒤 포천현감·아산현감 등을 지낸, 역학·지리·의학 등에 밝은 문인이었다. 화암서원은 본디 1610년 건립됐다가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됐다. 1920년 다시 지어진 뒤 1960년 초 청천저수지가 생기면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토정 이지함의 묘는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야산에 있다. 토정의 부모·형제·아들·조카가 함께 묻힌 가족 묘소다.

화암서원에서 보령시내 쪽으로 잠시 가다가 오른쪽으로,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산 밑에는 <관촌수필>로 이름난 보령 출신의 소설가 이문구(1941~2003)가 사용하던 집필실이 있다. 보령시는 애초 당대의 이야기꾼이었던 이문구의 집필실을 기념관으로 꾸밀 계획이었지만,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지금은 방치해두고 있다.

성주사 터의 삼층석탑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성주사 터의 삼층석탑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보령 여행길에 좀더 진한 가을 정취를 맛보겠다면, 성주면 성주리의 성주사터에 들러볼 만하다. 신라 말 ‘구산선문’(선종을 대표하던 아홉개의 사찰)의 하나로, 임진왜란 뒤 쇠락한 대규모 사찰 터다.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석등, 오층석탑, 삼층석탑 3기, 석불이 남아 있다. 우뚝한 오층석탑과 금당터 뒤로 나란히 배치된 삼층석탑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해설사가 대기한다.

보령/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보령 여행정보

보령 장현리 은행마을
보령 장현리 은행마을
가는 길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 타고 가다 광천나들목에서 나간 뒤 광천읍에서 21번 국도 따라 내려가 청소면 소재지에서 좌회전, 610번 지방도 따라 성연리, 오서산 등산로 입구, 황룡리 지나 장현리 은행마을로 간다. 내비 ‘신경섭 가옥’.

먹을 곳 보령시 동대동 ‘대화식당’의 조기탕·우럭탕·간제미탕·대구탕과 찜 등 제철 해산물 요리, 청라면 죽성로 ‘봉채국수’의 오뎅국수·웰빙짬뽕국수·해물생국수 등 국수류와 검은콩들깨수제비, 청라면 질마재길 ‘풀꽃향기’(카페 레스토랑)의 수제 돈가스.

묵을 곳 장현리 가까운 곳에 오서산자연휴양림이 있고, 성주산자연휴양림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통나무집 등을 이용할 만하다. 주말엔 당일 예약이 어렵고 평일에는 가능하다. 청라면 오서산 밑에 꿈의궁전 모텔이 있다. 보령시내 동대동 동대교 옆에 모텔들이 모여 있다. 대천해수욕장엔 한화리조트 대천파로스가 있다.

여행 문의 보령시 관광안내소 (041)932-2023, 보령시청 관광과 (041)930-3544, 장현리 은행마을 사무실(옛 장현초등학교 터) 070-7845-5060.

여행공책

(재)한국방문위원회는 11월6일 저녁 7시 서울 경복궁에서, 2018 평창겨울올림픽 성공 개최와 외래관광객 2000만명 달성을 위한 ‘2016~18 한국 방문의 해’ 선포식을 연다.

온라인 여행사 여행박사가 소방관과 가족들을 위한 무료 해외여행 프로그램(고마운 분들을 위한 리프레시 여행 1탄)을 진행한다. 소방관과 가족의 사연 공모에 11월10일까지 전자우편(hopetour@tourbaksa.co.kr)으로 신청하면 된다. 소방관 30명과 그 가족 1명씩 총 60명을 선정해, 2박3일간 일본 북규슈 여행을 보내준다. 발표는 11월12일. 누리집(www.tourbaksa.com) 참조.

켄싱턴 제주 호텔은 누리집에서 ‘떠나고 싶은 겨울휴가 스타일 선택 및 선택한 이유’ 작성 뒤 응모를 통해, 2박3일 디럭스룸 숙박권 1장(1등 1명), 켄싱턴호텔 여의도 숙박권 1장(2등 1명) 등을 주는 ‘2015 나의 겨울휴가 스타일 공모전’을 연다. 11월13일까지. 발표 11월23일.


(위 내용은 2015년 10월29일 인터넷한겨레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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