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집 아이들도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데 작년엔 <라이언 킹1,2,3>를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즐겨보더니, 어느샌가 지금은 지브리 애니메이션 매니아가 될만큼 푹 빠져 있습니다.
<토토로>부터 시작에서 어릴 때부터 쭉 좋아하긴 했지만, 큰아이가 10살을 넘으면서는 지브리의 주인공 캐릭터나 스토리를 좀 더 깊이있게 즐기고 이해하게 되어서 그런가 봐요.
오늘 학교에서 같은 반 남자아이가 큰아이에게 대뜸 묻더래요.
"유리짱, 유리짱은 커서 뭐가 되고싶은데?"
"음.. 글쎄.. 그건 왜 물어?"
"응, 지브리를 너무 좋아하니까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스텝으로 일하는 게 꿈일까, 싶었지."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의 이런 말을 듣고 딸아이는 내심 놀란 모양이예요.
내가 그렇게 좋아했나?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렇게까지 보였나? 싶었겠죠.
뭐 하나에 빠지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긴 하지만, 저러다 말겠지.. 좀 지나면 싫증내겠지..싶었는데 딸아이는 애니메이션 스토리가 담긴 책을 도서관에서 차례대로 빌려다 읽으며 대사를 줄줄 외우고, OST가 수록된 CD를 시내 도서관을 구석구석 뒤지며 찾아내 빌려다 듣고또듣고 했지요.
둘째까지 누나 영향을 받아, 둘이서 대사를 주거니받거니하며 재연도 하고 연극처럼 꾸며서 놀기도 하고 .. 아이들 아빠가 나중엔 아이들이 젤 좋아하는 몇몇 지브리 애니의 OST CD를 사 주었는데, 이걸 차례대로 들으며 배경음악에 맞춰 대사를 더빙(?)하기도 하고, 노래는 신나게 따라부르고 하며 이번 겨울을 정말 즐겁게 보냈답니다.
이쯤이면 지브리미술관 나들이를 한번 해도 괜찮겠다 싶어, 얼마전에 네 식구가 함께 다녀왔습니다. 미술관 입구에는 거대한 토토로 인형이 마치 직원인양 매표소 안이 꽉 차도록 버티고 있는데,
그 앞에는 이런 안내문이 쓰여있어요.
"진짜 매표소는 저쪽입니다." ^^
<라퓨타>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둘째가 이곳을 좋아해서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지브리 미술관은 야외는 사진촬영이 가능해도, 실내는 금지.. 사진으로 담기보다 마음에 담아주셨으면..하는 안내문이 있는데, 사실 사진을 찍지않는 게 더 집중해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이곳 역시 둘째가 참 좋아했는데, <토토로>에 나오는 막크로크로스케. 한국어론 뭐라 번역되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창문 안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정말 쳐다보고있는 것 같아 어린 아이들이 즐거워 했지요.
미술관 내에 있는 레스토랑 <밀집모자>. 지브리는 밀집모자에 대한 로망이 꽤 강한 듯^^
토토로의 메이도 밀집모자를 쓰고 나왔더랬죠.
참, 토토로의 그 유명한, 아루꼬..아루꼬..와타시와 겡끼.. 로 시작하는 주제곡의 가사는
<구리와 구라>그림책의 글작가가 작사한 거랍니다. 어린이집 보육교사 일을 오래한 <구리구라>작가의 글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무척 좋아해서 의뢰했다고 하네요.
아이들과 여행을 할 때 참 좋은 건, 어른들에겐 무심히 지나치게 되는 것들을
아이들의 눈을 통해 '아! 그러네' '어! 진짜다!' 하며 뒤늦게 알아차리게 될 때.
소지품 보관함 앞에서 제가 멍-하니 서 있는데, 딸아이가
"번호표에 나이테가 그려져있네. 초록이랑 갈색이랑 나무를 이미지로 만들었나봐."
아! 정말 그러네. 이 열쇠고리 너무 이쁘다 그지? 미술관 내의 전시공간도 근사했지만
이런 작은 소품 하나에도 지브리스러움이 잘 드러나는게 이곳의 매력.
관람을 모두 마치고, 미술관을 나와 넷이서 역까지 걸으며 각자 오늘의 감상을 나누었습니다.
큰아이는 무척 만족스러워했고, 꿈, 상상, 희망 같은 낱말을 실감하는 듯한 표정.
작은아이는 토토로의 고양이버스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안아달라, 업어달라 하고..
남편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하네요.
저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긴 하지만 서구 특히 유럽문명을 지나치게 동경하는 듯한
배경이나 인물묘사가 늘 걸리더군요. 필요해서 선택하긴 했겠지만, 늘 유럽의 명작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것도 좀 어색하기도 하구요. 아이들이 지브리 애니에서 가장 공감하는 건 뭘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저희집 두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니 바로 '먹는 것'이었어요.
뽀뇨에서 배고픈 아이들이 달걀과 햄과 파를 넣은 라면 그릇 뚜껑을 열며 황홀해하는 장면이나

<코쿠리코 자카>에서 식구들 아침밥을 차리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쌀독에서 쌀을 꺼내고
밥을 퍼담고 된장을 끓이는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보며 그렇게 좋아라 합니다.
이 장면에 나오는 아침밥 노래 가사 - 달걀은 보들보들 / 두부는 부들부들 / 도마는 톡톡톡 /
냄비는 슈슈- / 낫토는 끈적끈적 ... - 이 노래를 지겹도록 부르면서
아침밥을 먹고 학교와 유치원을 갑니다.
내일은 00에 나온 것처럼 똑같이 달걀을 구워달라고 하면서요.

좋은 애니메이션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아마 아이들은 자기들의 일상과 닮은 소재와 이야기를 친근하게 느끼며 즐기는 것 아닐까 싶어요.
빵, 버터, 베이컨 .. 같은 소재보다
쌀과 된장, 채소반찬, 떡 .. 이런 소재가 아시아 아이들에겐 더 현실감이 들겠죠.
<겨울왕국>이 무척 기대되어 여기서도 3월에 개봉이 되면, 오랫만에 큰 화면으로 애니메이션을 한번 보고싶다며 벼르고 있긴 한데, 우리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이름과 머리색을 한 주인공의 멋진 이야기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더라구요. 안나와 엘사가 아닌, 연아처럼^^
친근한 한국 여자아이의 이름으로 멋지게 고정관념을 깨는 삶을 선택하는 신선한 이야기를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도 볼 수 있었으면, 아이들이 그런 주인공을 동경하며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제 생각이 너무 낡은 걸까요?^^
비슷한 시기에, 김연아의 아름다운 공연을 볼 수 있었다는게, 훌륭한 어떤 애니메이션보다 감동적인 현실이었기에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금메달을 놓친건 안타까웠지만, 심각한 한일관계 속에서도
일본인들에게 김연아는 이미 고유명사로 인식되어 있는 것 같아요.
질투가 부질없을만큼 너무 훌륭하다는 걸 다들 인정하니까요.
어쩌다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서 김연아 이야기로 흘렀는지^^
아마 저희 딸아이가 자기보다 조금 더 나이많은 멋진 언니들을 동경하는 시기라 그런가 봅니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고 그녀의 머리모양을 따라하고 하는 애니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야무지고 당차고 진실하고 성실하거든요. 그녀들을 흉내내며 동일시하고 싶은 거겠죠.
따라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예요. 같은 문화와 언어를 쓴다면 더 기쁘구요.
김연아처럼 딸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지브리 탐방은 이런 질문을 남기고 끝을 맺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