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속으로 넘어오는 시원한 추억


’도림’의 중국식 냉면.

[한겨레 esc]

새 일터 잡은 스타셰프 여경옥·박찬일의 ‘더운 날이면 생각나는 음식’

중국에는 없는 중식 냉면

면은 통통하고 소스는 땅콩
부드러운 곡선의 맛이다
미역·오이에 식초·간장으로 간한
어릴적 물국수는 새콤했고
펌프물은 퍼올릴수록 시원했다

‘도림’의 여경옥(51)씨

중식 요리사로, 이탈리아요리 전문 셰프로 이름이 알려진 여경옥, 박찬일씨가 최근 새 둥지를 틀었다. 7월 불볕더위가 일찌감치 대지를 점령한 6월, 그들을 만나 새 보금자리에 대한 얘기와 잊지 못할 여름음식을 들었다.

지난 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중식당 ‘도림’. 한차례 손님들을 치러낸 중식당의 오후는 개미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하다. 껑충한 키의 여경옥(51·사진)씨가 뛰어나와 반갑게 맞는다. 호텔 중식당으로 복귀는 5년 만이다. 16살부터 중식당에서 일한 그는 1984년 신라호텔에 입사해 24년간 중식당 ‘팔선’에서 승승장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라호텔의 경쟁사인 롯데호텔이 그의 새 일터다. 5년간 공들인 그의 사업장, ‘루이’는 현재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형 여경래씨에게 맡겼다. “형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중국인들과 합작해 홍콩 진출도 성사될 상황이었거든요.” 인연의 끈은 질긴 법이다. 현재 롯데호텔 서울 김정환 총지배인과는 신라호텔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였다. 당시 여씨를 눈여겨봤던 김 총지배인이 그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평양감사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이다. “내 업장에서 큰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괜찮았죠. 살짝 명예 같은 것에 욕심이 생겼어요. ‘도림’을 최고로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요.”

인생경로 변경 이유를 설명한 그가 어린 시절 먹었던 여름음식 보따리를 풀자 ‘도림’은 순식간에 70년대 경기도 수원 매산시장 골목으로 변한다. “옛날에 먹을 게 어디 많았나요! 어머니가 수박 한 통 사오면 큰 통에 (수박 속을) 퍽퍽 파서 넣고, 사카린 물 타서 뿌려 먹었죠.” 수박화채가 가난한 화교 꼬마에게는 여름간식의 전부였다. 어쩌다 구해 온 얼음알갱이도 천하에 둘도 없는 찬 주전부리였다. 그는 해가 길게 늘어지는 여름 날이면 바가지를 들고 수원역 근처 매산시장 나들이에 나섰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 더우면 더울수록 날개를 다는 게 얼음이었다. 그는 어른들 바지춤 사이를 비집고 얼음가게 문 앞에 딱 버티고 섰다. 주인이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톱으로 자를라치면 그는 바가지를 얼음 아래 바닥에 딱 붙였다. 쓱쓱 흥부 박 타듯이 갈면 자동으로 얼음조각이 떨어진다. “공짜죠. 야단 안 맞았어요. 다 동네 아저씨, 아줌마였으니깐요.” 비만 오면 반은 잠기는 동네였지만 인심이 좋았다.

박찬일 셰프가 주방을 책임지는 레스토랑, ’인스턴트 펑크’의 외관.

성인이 돼서 노상 먹는 음식은 냉면이다. 5월 말부터 9월까지, 5년 내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었다. “맛있잖아요. 속까지 시원해져요.” ‘냉면식신’이라 명명해도 되겠다. 하지만 그의 냉면은 우리 평양냉면이 아니다. ‘중국식 냉면’이다. 평양냉면이 날카로운 직선이라면 중국식 냉면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면은 평양냉면보다 굵고 통통하다. 국물은 닭 육수에, 고명은 탐욕스럽게 면을 덮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진 듯 많다. 평양냉면은 메밀가루가 주재료지만 중식 냉면은 밀가루와 소금이 다다. 육수에는 양파, 대파, 생강 등 갖은 채소가 닭의 누린내를 잡기 위해 들어간다. 양념은 또 어떠한가! 평양냉면에 뿌리는 식초와 고춧가루가 격렬한 어른들의 추임새라면, 중식 냉면의 양념인 땅콩소스는 어린애 소꿉놀이처럼 아기자기한 맛이다. 중식 냉면은 면을 삶자마자 먹어야 한다고 그가 알려준다. 뜨거운 차 한 잔도 여름 더위를 날리는 데 요긴했다. “뜨거우면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들어요. 중식은 원래 찬 음식이 별로 없어요. 후식도 바나나탕, 고구마탕 같은 거죠.” 중식 냉면도 이 땅에 터를 잡은 화교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이다. 중국에는 없다. 중국 본토의 짜장면이 우리식 짜장면과 다르듯 중식 냉면도 비슷하다. “중국 본토의 중국식 냉면이라면 비빔면 형태예요. 면과 각종 찬 재료들을 땅콩소스와 비벼 먹죠.”

그가 와서 본 ‘도림’은 “좋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로 보였다. 사람들을 확 끌어들이는 ‘이것 하나!’가 없었다. 퓨전이 가미된 현재의 도림을 “광둥식과 산둥식을 강화해 전통성을 살리겠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인스턴트 펑크’의 박찬일(48)씨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박찬일(48·사진)씨의 새 보금자리 ‘인스턴트 펑크’(instant funk)는 서울 이태원동에 있다.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에서 2~3분 거리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풍경은 여름날 모시 적삼처럼 훤하게 통한다. 온통 투명한 유리창인 벽을 통해 지나는 이도, 식사하는 이도 서로가 보인다. 박씨는 지난해 홍대 앞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꼼마’를 떠나 올해 5월 초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차림표에는 파스타가 많지 않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아닙니다. 양식 밥집입니다.” 그는 단호하다. 파스타 면 사이로 물컹한 곱창이 맛깔스럽게 포진해 있는 ‘곱창찜파스타’, 남원 흑돼지를 재료로 쓴 ‘족발찜’, ‘족발샐러드’, ‘누룽지 닭튀김’ 등 메뉴가 별나 보인다. “셰프 놀이 지긋지긋하고, 그냥 먹어서 맛있는 거 하자라고 생각했어요.” 코스도 없다. 격식을 덜어냈다.

그의 기억 속 여름음식은 물국수다. 그에게 물국수는 공중에 떠도는 밀가루 냄새이자 강렬한 여름 햇볕이고, 펌프의 녹슨 맛이다. 달군 프라이팬처럼 더위가 몰려오면 그는 “엄마, 물국수!” 소리를 했다. 냅다 뛰어 국수를 사러 가면 코끝을 팍 치고 들어오는 밀가루 냄새에 어린 찬일은 신났다. 국수 가게 발에 걸린 긴 면 사이로 여름날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비췄다. “국수를 (펌프 물에) 헹굴 때 밀가루 특유의 냄새가 햇살에 닿는 느낌이 났고, 채반에 건져놓으면 햇살이 거기에 떨어져 국수가 거의 투명하게 보였죠. 헹굴 때마다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졌어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의 그의 기억은 한편의 단편소설을 보는 것 같다.

파스쿠찌에서 파는 레몬 모히또 그라니타와 수박 그라니타.

미역, 오이채 넣고 식초와 간장으로 간한 물국수는 새콤했다. 퍼 올릴수록 시원했던 마당의 펌프 물은 더위를 저 멀리 쫓아버렸다. 국수물에 녹아들어간 펌프의 알싸한 녹슨 맛을 잊지 못한다. “천천히 씹어 죽처럼 넘어가는 맛이 아니라 통째로 목구멍을 자극해 넘어가는, 아찔한 통증의 맛이었죠.” 그 맛은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둘 때까지 혀에 박혀 있겠지만 가공이라고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 녹슨 맛까지 재현할 수는 없다.

그가 요리를 공부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는 그라니타(granita)에 대한 기억이 있다. “시칠리아의 오래된 전통빙수죠. 얼음에 설탕이나 꿀을 쳐서 먹은 귀족들의 여름음식이었어요.” 셔벗과 비슷한 모양새다. “이탈리아에는 여름용 음식이란 게 없어요. 냉커피도 미지근해요.” 종종 한국 이탈리아 레스토랑 차림표에서 보이는 ‘냉파스타’도 이탈리아에는 없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 온 게 아닐까 추측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여경옥 셰프가 제안하는 여름음식

감 디저트

재료
: 홍시 1개, 물 반컵, 타피오카 1큰술

만드는 법: <1> 타피오카는 물에 20분 정도 담가 놓는다. <2> 홍시와 물을 섞어 믹서기에 간 뒤 살짝 얼린 다음 그릇에 담는다. <3> 불려 놓은 타피오카를 끓는 물에 투명해질 정도로 데친 다음 찬물로 씻어서 갈아 놓은 홍시 위에 올려 낸다.

중식 냉면

재료: 생면 160g, 가리비 1개, 오이 약간, 중짜 새우 1마리, 해파리 30g, 오향장육 30g, 달걀 1개, 땅콩소스(땅콩버터 1큰술+물 2큰술), 냉면 육수(육수 2컵, 청주 1T, 간장 3T, 치킨파우더 1t, 설탕 1t, 식초 2T, 소금 1t)

만드는 법: <1> 냉면 육수는 미리 섞어서 냉장고에 넣어 차게 해 놓는다. <2> 생면은 끓는 물에 삶아서 찬물에 잘 씻어 그릇에 담는다. <3> 해파리는 데쳐서 물에 담가 소금기를 잘 빼주고 중짜 새우는 삶아서 반으로 가른다. <4> 오향장육과 가리비도 편으로 썰어 준비한다. <5> 달걀 지단을 부치고 오이와 같이 채로 썰어서 다른 재료와 함께 국수 위에 올려 준다. <6> 냉면 육수를 붓고 땅콩버터를 곁들인다.

※육수는 닭, 대파·생강·마늘 한 개씩 같이 넣고 물을 5리터쯤 부어서 3시간 정도 끓여 낸다. 오향장육 대신 편육을 사용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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