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이 많아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쁜 날.
고개를 들고 보니, '엇, 벌써 점심시간?'
또 고개를 들고 보면 '엇, 벌써 여섯 시?'
열심히 '일'을 한다기보다는,
그냥 나 자신이 하나의 '업무'가 되어 그것에 오롯이 함락당한 것만 같다.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머릿속이 꽉 찰 만큼 뇌를 쓰다 보면,
퇴근길에는 누렇게 뜬 얼굴에 풀린 눈, '띵' 하고 멍한 상태가 되어 집에 들어간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면,
내가 왔음을 알려 주는 이모의 목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퍼진다.
"하윤아, 엄마 왔네!"
신발을 벗으며 빼꼼 안을 들여다보면,
나와 눈이 마주친 하윤이는 아주 아주 신 난 표정으로 뒤뚱뒤뚱 걷는 듯 뛰는 듯 다가온다.
아이는 돌이 지나고 걸음이 부쩍 늘었다.
"하윤아, 엄마 왔어!"
아이의 작디작은 몸을 껴안는다.
내가 자기 세상의 전부라는 듯, 날 보며 더없이 환하게 웃어 주는 딸.
아, 정말 좋다.
마치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것처럼,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되는 저녁 시간.
아이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던 낮 동안의 바쁜 시간은 사라져 버리고,
'한 아이의 엄마' 역할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에 돌아와서부터 나는 아이와 한 몸이 되어 밥 먹고 이 닦고 오줌 누고 이부자리에서 부비대다가 아이를 재운다.
옆에 내가 없어도 잘만큼 아이가 잠에 푹 빠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온다.
그러고는 누렇게 뜬 얼굴 군데군데 들러붙은 화장을 지우려고 거울을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나 지금 꼭 '이중생활'을 하는 스파이 같다고 말이다.
낮 동안의 '나'는 누구인가.
집에 와서 아이와 함께하는 '나'는 또 누구인가.
회사에서는 '아이 낳고 변했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집에서는 '회사 일이 바빠서 힘든' 모습을 아이 앞에서 보여 주기가 싫어서,
어쩌면 나는 지금 '완벽한 위장'을 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사이 스며드는 힘들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모른 척하고
남편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친정 식구들에 대한 고민을 쌓아만 둔 채
자전거 타기나 학원 다니기 같은 취미와 자기발전에 대한 로망과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한 작은 열망,
헬스나 요가를 등록해서 가열차게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마음(뭐, 그 마음이 일주일도 채 안 되어 끝날지라도..^^;;)을 버뮤다 삼각지대에 묻어 두고는
이제는 그 마음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더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 건 아닐까.
목을 가누고 뒤집기를 하고 스스로 앉아 있다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기까지,
아이의 첫 일 년은 하루하루가 실로 경이로웠다.
사람들은 내게 '수고 많았다'라고 많은 축하와 격려를 건네지만 나는 아직도 많이 얼떨떨하다.
백 일의 출산휴가를 마치고 회사로 복직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8할은 내 몫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 세 달 아이를 돌봐 주신 베이비시터 이모님,
그리고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함께 지내며 아이뿐 아니라 살림까지 해주시고 있는 둘째이모.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의 이중생활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 스스로 일 년을 참으로 멋지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냈다.
아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인지를 몸소 보여 준다.
때 묻지 않은 웃음이 어떤 것인지,
하루하루가 자라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아이가 보여 준다.
이것보다 더 큰 자연이 있을까.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나는 이 모든 사실 앞에 부끄럽고,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아이를 위해,
어쩌면 아이보다 나 자신을 위해,
우리 가족의 탄생부터 현재, 하루하루 나아갈 앞으로의 모습까지...
그리고 직장맘으로 살아가는 나의 좌충우돌 '이중생활'을 하나씩 기록해 보고 싶다.
이곳, 베이비트리라면 은밀하고도 위대하게, 가능하지 않을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