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증조할머니를 만나 뵈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다섯 살 때쯤의 기억이다.
은비녀로 쪽진 백발머리, 허연 저고리 한복에 고무신, 쭈글쭈글하기 이를 데 없는, 안아주마 펼친팔 끝의 마른 손,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던 할머니 귀신처럼만 보였던 나의 증조할머니. 지금이야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가감없이 받아들여지는 꼬마의 시각적 자극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모습.. (아..할머니 죄송합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TV 뒤를 파고들어 숨기 바빴다. 예쁜 손녀딸 안아보고 싶은 그 간절한 맘을 다섯 살짜리로서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다섯 살이 증조할머니를 처음 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게 남아 있는 증조할머니의 기억은 그것이 처음. 그 뒤로의 기억. 두어 번 더 도망 다니며 결코 안기지 않았고, 결국 돌아가신 후 염하기 전 뵈었던 앙상한 시신의 발.. 그것이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마지막.
올 설에는 얼마 전 요양원에 입원하신 나의 친할머니, 꼬마의 외 증조 할머니를 방문했다. 할머니는 힘들게 살아오신 전형적인 촌부.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농사 지어 건사하시느라, 허리는 펼 수가 없고, 다리는 완벽히 o자형으로 휘어버리셨다.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 하시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안 아픈 데 없는 치매노인이 되어 계신다. 오래 남지 않았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만큼…
나의 할머니 뿐만이 아니었다. 그 요양병원에 누워계시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지금 당장에라도 죽음의 신이 데려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상 밖에 있는 많은 인간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것인가 싶게 ‘죽음에 임박한 고통’, ‘인간의 마지막 모습’ 뭐 이런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 그래도 그 안에 있는 분들은 혼자 외로이 삶을 마감하시는 어떤 분들 보다는 나으리라..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나도 저렇게 늙고 말겠지? 하는 두려움과 함께..
꼬마는 “늙어버린 인간, 죽음과 가까이 닿아있는 자연스러운(?) 노쇄한 인간의 모습”에 낯설어했다. 그때의 나처럼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나의 할머니에게 다가가는 것을 거부했다. 다녀간 것을 기억하진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아직 나와 남편, 그리고 증손주를 알아보시는 할머니에게 잠시의 기쁨이라도 드리고 싶어 꼬마를 꼬셔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워레인저 레어 아이템을 사줄께. 할머니 꼬옥 안아드려!” 하지만, 꼬마의 한계는 안녕하세요 인사하기와 악수하기가 전부.
닥달하려는 남편을 말렸다. 꼬마는 아마 최선을 다한 것일 거라고.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는데, 지금 꼬마는 잘하고 있는 거라고~ ^^;; 그리고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또 그리고 꼬마는 그 레어 아이템을 획득하셨다 --;;
할머니는 지금 우리가 다녀갔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들었다. 하지만, 꼬맹이의 손을 잡고 인사한 기억이 할머니 무의식에 남아 조금이나마 엔도르핀이 되어 남기를 소망한다.
답이 없는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 담담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