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 이런 전화 참 많이 받아. 고추 좀 주문하려는데 그거 태양초죠? 그럼 내가 물어. 혹 이정재와 정우성이 함께 나왔던 청춘 영화 아시나요? 아, 태양은 없다! 그래요. 태양초도 없어요.
우선, 태양초는 없다는 사실부터 밝히고 가자. 여기서 말하는 '없다'는 그러니까 내가 태양초를 만들지 않아서 팔 물량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태양초라는 건 애초에 돈을 주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천일건조 태양초는 볕 좋은 날에만 말려도 열흘이 넘게 걸리는데 비 내리고 날 흐리면 반 넘어 희나리라 고추 팔아 생계를 삼아야 하는 농가에선 애시당초 가능한 미션이 아니야. 자식들 먹일 정성 아니고선 만들어질 수가 없는 게 천일건조 태양초인데 그렇게 만든 고추를 팔 친정어머니가 어딨겠냐고.
그럼 시중의 허다한 태양초는? 물론 made in 비닐하우스지. 그런데 한낮의 하우스 온도는 가뿐하게 70도를 넘는다는 게 문제야. 온도가 높으면 영양파괴가 일어나거든. 그럴 바엔 고추건조기에 넣는 게 낫지 않냐고? 낫지 않지. 굳이 하우스를 고집하는 이유는 꼭지 색깔 때문이야. 볕에 말리면 꼭지가 탈색되어 흰색이 되거든. 흰색이어야 태양초로 인정받고 그래야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작년 겨울 서울 간 김에 인왕시장에 들러 마누라 등쌀에 고추사러 나온 어리숙한 남편 노릇을 해봤어. 건조기에서 삶은 뒤 볕에 말린 반양건초면 속는 척이라도 해줄 텐데 아예 건조기에서만 말린 화건초가 뻔한데도 태양초라며 권하더군. 시장이 이 지경이니 다들 농가에 직거래하면 태양초를 살 수 있겠다 믿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태양초는 없어. 없을 뿐더러 그닥 좋지도 않아. 고추가 열흘 넘게 볕에 있다고 생각해봐. 매운 맛은 휘발되고 붉은 색은 탈색되는데 먼지는 또 어쩔거야. 예로부터 고추를 볕에 말린 건 햇볕 말고는 고추를 말릴 다른 방법이 없어서였다니까. 양양학적으로도 건조기에서 말린 화건초가 태양초보다 낫다는 학자도 있는 지경이니 굳이 없는 태양초를 구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단 얘기지.
애쓰지 않아도 사실 우리는 100% 천일건조 태양초를 거의 매일 먹고 있어. 일반 식당에서 쓰는 고춧가루는 죄 made in China인데 이게 진짜 천일건조 태양초란 말씀. 중국에서는 고추를 수확할 때 고추를 하나씩 따지 않고 고춧대를 통째로 뽑아 밭에 두었다가 고추가 볕에 다 마른 뒤에 한꺼번에 따거든. 그야말로 오리지널 태양초지. 먼지 투성이 아니냐고? 어허, 태양초라니까.
- 농부 통신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