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내기로 한 호주여행책 원고수정 마감날짜가 한달도 안 남아서
낮에는 거의 서재에 있는(있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웬만하면 혼자 잘 노는 아이가
요즘은 유난히 내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한다.
주방에 있으면 주방으로 거실에 있으면 거실로
화장실까지 졸졸졸 따라와 강아지처럼 내 다리에 착 달라붙는다.
특히 잠이 올 때, 배가 고플 때.
오전에 글이 좀 풀려서 여유가 있던 오후,
간식을 먹고 놀다가 잠이 오는지 눈을 비비는 아이를 업었다.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쿵쿵 치며 노래를 불러주고
거울을 보며 깍꿍 놀이를 하다가
무릎담요로 폭 감싸주었더니 스르르 어느새 잠에 빠져 들었다.
아이 옆에 누워 같이 잘까 하다가
오래전에 사두고 못 읽은 책을 펼쳤다.
원래는 밴드를 하던 가수인데(이것도 지금에야 검색해 본 것이다)
4년 전 산문집을 내서 엄청난 히트를 쳤던,
-아마 내 책이 그 정도로 팔린다면 난 미추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가 4년 전에 낸 그 책을 재밌게 술술 읽었다.
감탄하며 질투하며.
한 시간 쯤 지나자 아이가 눈커풀을 사르르 뜨기 시작했다.
너무 귀엽고 예쁘다.
자고 일어나면 으엥~ 한 번 우는 소리를 하는데
내가 옆에 있으면 어떨까 궁금했다.
책을 덮고 벽에 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아이 옆에 누웠다.
그런데 으엥~ 똑같다.
엄마가 있으나 없으나 너의 울음소리는 일어났다는 신호구나.
앞으론 덜 마음 아파해도 되겠다.
아이가 누운채로 손가락을 빤다.
잠들기 전, 일어난 직후 아이의 습관이다.
두번째 손가락이면 동생이 딸이라던가?
암튼 남편은 요새 틈만 나면 임신타령이다.
내가 내년에 여행을 못가게 하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부디 그의 술수에 넘어가지 말아야는데.
아이 옆에서 다시 책을 펼쳤다.
관심을 보이길래 들려줬더니 두꺼운 책을 제대로 들지 못해
이마에 쿵쿵 찧기만 한다.
노란색 표지부분만 떼어 주었다.
띠지나 이중표지는 낭비라고 여기는 편인데
오늘 딱 한 번 제 몫을 했다.
문득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무조건적일 수가 없다.
늘 내품에 안기고 싶어 하고
내 등에 얼굴을 묻고 싶어 하고
못생긴 젖가슴을 사랑하며
아침에 일어나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언제나 환하게 웃어 주는 이 아이.
엄마가 보는 책, 엄마가 쓰는 노트북,
엄마 책상, 엄마 휴대폰이 젤로 궁금하며
뭐든 엄마랑 같이 하고 싶은 아이.
아이에게서 내가 받는 것에 비하면
내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일이 힘들거나 칭얼거림에 지치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려 버리니까.
아, 난 언제쯤 너에게
어른답게, 아니 아이같은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따뜻할 것 같은 남쪽 동네이지만 산골마을의 겨울은 서울보다 빨리 찾아왔다.
이미 몇주 전에 출산하고 입었던 겨울 바지를 꺼냈고
오늘은 수면양말을 찾아 신었고 내복도 꺼내두었다.
거실 온도계는 22도, 남쪽으로 창이 나 있는 침실 온도는 무려 20도.
과연 올 겨울 난방비가 얼마나 나올까, 마음이 조마조마 하다.
지난 주말, 평소 생각했던 대로 소박하게
부모 형제들만 모시고 아이의 첫 생일을 축하했다.
아이 돌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건
거실에 걸려있는 사진 현수막과 냉장고에 가득한 식재료들 뿐.
우린 그 날도 오늘도 여전한 하루를 보낸다.
거실 천장에 붙은 풍선들의 바람이 다 빠지면
준영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면
우리들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는 느낌이 들려나.
언제고 그렇지만
참 바쁘고 알찬, 설레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