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날 아침,
오늘은 무엇을 하며 보내볼까..생각하던 나는 (얼마 전 병문안을 다녀왔던) 친할머니의 작고소식을 전해 받았다. 부모님은 생일날 이런 소식을 전해 미안해하시고는 학업 때문에 나와 같이 지내고 있는 막내 동생에게도 밤 늦게 공부를 마치고 오면 전해주고 다음 날 장례식장으로 오길 바라셨다. 사안의 경중을 따져보면 앞뒤가 바뀌어버린 것 같았지만,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겠구나~싶어 그러겠노라 하고 나니... 대체 무엇을 어찌하고 있어야 할지 멍~했다..
우리 할머니가 가셨구나…
(고인의 넋두리처럼) 고생하고 희생만 했던 여든 셋,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치시고.. 할아버지 만나러 가셨구나..
할머니는 그 시대 태어난 모든 촌부가 그러하였듯이, 못 먹고 덜 입으며 힘겹게 육남매를 건사하시고, 남편 봉양하며 사셨다. 오십이 되기도 전에 나의 할머니가 되셨는데도 곧 허리가 꼬부라지고, 다리가 휘셨다.
나는 집안의 첫 손녀. 그만큼 할머니에게는 “우리 강아지, 아이고 내사람~”이었지만, 자신이 희생한 만큼 자식들과 남편에게 사랑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던 할머니의 넋두리는 집안 어른들께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35년간 지켜봐 온 애증의 역사가 이렇게 끝났다.
생각보다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는지 슬픔에 휩싸여서 정신 못 차리진 않았다. 나는 나만의 의식을 준비했다. 영정 앞에 놓아드릴 생각으로 평소에도 가끔 사드리던 할머니의 화장품을 사고, 예쁜 편지지, 볼펜을 하나 샀다. 할머니와 몇 안 되는 추억을 떠올리며 “할머니, 안녕”을 주제로 한 안녕편지를 쓰고.. 화장품도 예쁘게 포장하고, 장례식 갈 차비를 마쳤다. 내가 이런 준비를 하는 것이 (아직 누군가의 죽음을 겪어본 적이 없는)꼬마에게도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으로 떠나면서 우리 꼬마에게도 설명했다. 지난 번 병원에 가서 뵙고 왔던 증조할머니가 이제 하늘나라에 가시게 되었으니, 우리가 배웅을 하러 가야하노라고..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일부이고,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꼬마였지만, 직접 장례식을 겪게 되니 이리저리 신기한 것이 많았나 보다. 장례절차를 거치는 동안 나와 남편은 번갈아 가면서 저만치 떨어져 있어야 했다. 꼬마녀석의 ‘죽음과 장례절차’에 대한 폭풍질문이 혹여 장례 분위기를 해칠까 봐서였다.
빈소의 영정 앞에서도, 발인을 할 때에도 할머니가 어디 있는지, 눈은 감고 있는지, 몸은 움직일 수 있는지, 왜 나무로 된 관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인지 꼬마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화장장으로 향하는 영구차를 따르자, 그때서야(결국 3일 내내 질문공세였다는 이야기) 좀 정리가 되는 듯이 말했다.
‘저 버스가 증조할머니가 하늘나라 가는 버스야? 저 버스가 날아서 할머니를 데려다 줘? 우리는 저 버스가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날아서 할머니가 하늘나라 가는 거야?’
자기 나름의 개념정립을 하려는 모양이었나 보다. 나와 남편은 폭풍 질문을 하는 아이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죽음을 설명해보고자 애를 써야 했다. 궁금해하니까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덜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꼬마는 생각보다 일찍 죽음에 관해 알아버렸지만, 생각보다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화장장에서 작은 유골함에 쏙 담겨온 나의 할머니를 보며,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난 자리에 남은 것들을 이렇게 보관하는 것이라고, 진짜로 안녕하자고 정리해주었다. 아직도 꼬마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증조할머니의 목소리가 궁금하다며, 가끔씩 그 날 이야기들을 꺼낸다. “엄마, 나는 엄마가 너무너무 예쁘고 좋아서 엄마랑 같이 하늘나라 갈래~”라며.. 조금씩 조금씩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확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니야, 엄마가 너보다 훨씬 더 나이가 빨리 들거고 빨리 죽을거야. 넌 오래오래 살아” 하기보다는 “그래 우리 손잡고 같이 하늘나라 가자”라고 한다.
슬프지만, 너무 슬프지 않게, 마음속에 담고 보내드리는 장례식이었고, 나는 아직도 천천히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있다. 보내도 보내도 떠나지 않는 추억은 오래도록 남겠지만..
할머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