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농부는 철학자다. 농부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물을 심으려면 두둑을 짓고 비닐을 덮어야 하는데 이 작업은 관리기를 후진하며 운전해야만 가능하다. 옆 이랑과 적당한 간격인지, 밭의 경사는 어떤지, 밭 경계는 어딘지 계속 뒤를 살피면서 뒷걸음 치지 않으면 이랑은 곧 지렁이 지나간 자국이 된다.

두둑을 짓고 밭 장만이 끝나 작물을 심을 때면 철학하는 농부의 본색이 드러난다. 오늘은 검정콩을 심어 볼까나. 이랑은 길고 심어야할 콩는 두 마지기 15,000알쯤. 이걸 언제 다 심나 걱정은 얼치기 농부의 몫. 진짜 농부는 다만 지금 심는 콩 한 알만 생각하더군. 이따 심을 콩 15,000알은 이따 심을 거니까 이따 생각하고 지금 손에 들린 건 그저 콩 한 알, 고추 한 포기.

평생을 속아왔었지.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더 넓은 집,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은 참고 견디고 감내하라고. 하지만 살아보니 더 나은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기만 하더군. 다들 죽자고 오늘을 살았는데 내일은 더 죽어날 게 뻔해서 아, 어제는 그나마 좋았지 하며 살게 되더군. 어느 누구도 지금 여기, 오늘 이곳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농부는 '그 뻔한 걸 여태 몰랐어?'하며 콩을 심고 있더군. 콩 한 되 값이 두부 한모 값이 되거나 말거나 콩을 심고, 고추 한 근이 짜장 한 그릇 값이 되거나 말거나 고추를 심더군.

심는 일은 언제나 오늘 해야할 일이고 거두는 일은 아예 기대 밖의 일이더군. 내일은 서리가 내릴 지도 모르고 추수 전날 우박이 내릴 수도 있지. 하늘이 반 짓는 농사, 농부는 그저 오늘 할 일을 오늘하고 삽을 씻고 돌아가는 저녁에 막걸리 한 잔 마시면 그걸로 좋은 거지. 내일 닥칠 태풍 따위는 내일 또 어떻게 될 터. 우박 걱정하다가 저리 예쁜 찔레꽃을 그저 지나면 저만 손해란 걸 농부는 몸으로 알더군.

그래도 찔레꽃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나도 반농부는 된 걸까. 화무십일홍. 카르페디엠.

- 농부 통신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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