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던 프로젝트가 드디어 끝났다.
무려 3년 7개월만에.
그 중 3년 동안은 주말 근무와 철야 작업이 끊이지 않았는데남편 역시 토요일은
물론 3주에 한번 일요일도 출근하는 상황에서 주말 근무는 정말
치명적이었다.
그래도 걱정 없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개똥이를 언제든 맡기라는
큰올케와 작은올케 2명의 든든한 지원군 덕택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개똥이는 큰외삼촌과 작은외삼촌 집에 수시로 놀러 갔을 뿐 아니라
큰외삼촌의 처가에도
가고 작은외삼촌 동네사람들과 캠핑을 가기도 했다.
하여 프로젝트가
끝나고 휴가를 받으면 ‘결초보은 하리라’ 다짐했고,
아이들 방학 시
7월 마지막 주는 내가 조카 셋을 돌보겠노라 일하는 올케 둘에게 제안했다.
큰 동생네 애들
2명과 작은 동생네 2명 중 1명(작은 녀석은 어린이집 등원).
큰올케는 오전근무만
하기에 오전에는 혼자 애들 넷을 보지만,
오후에는 둘이서
보는 것이라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큰올케는
회사일만하던 내가 혼자 아이 넷을 본다는 것이 못 미더웠는지 월~수 3일
휴가를 냈다.
어?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토요일.
큰동생 집으로
모여 1박을 하고, 작은 동생네는 조카 1명만 남겨 두고 귀가하기로 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제일 어린 녀석이
자기도 남아서 누나 형아들이랑 같이 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럼 그럼 그렇겠지.
다들 모여서 노는데
혼자 어린이집 가는 거… 당연히 싫겠지.
그리하여 어린이 5명 확정.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작은 올케더러 마침 남편도 지방 출장 중이겠다
혼자만의 저녁
시간을 만끽하라 했는데,
혼자 자는 거
무섭다며 퇴근 해서 큰동생네로 오겠단다.
대략 반전이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저녁엔 엄마와 같이 잘 수 있어서)
결국 ‘결초보은 공동유아’는 ‘민폐육아’가 되었지만 간만에 뭉친 독수리오형제는 즐거웠다.
밤이면 거실 에어컨을
켜고 어른 아이 다 같이 모여서 잤고
아침식사 후 1시간 가량은 공부나 숙제를 했고 40분 게임 제한 시간도 잘 지켰다.
애들이 지루해하고
어른들도 힘들 때면 어쩔 수 없이 TV시청을 권하기도 했지만,
입장료 2천원짜리 방방장에 애들끼리만 놀러 가기도 하고
옥상에 특별히
설치한 풀장(?)에서 물놀이도 하고
김밥도 제 손으로
말아서 먹고
어린이 박물관도
가고 같이 영화 ‘빅’도 봤다.
- 어린이 박물관, 바닥 분수대
- 공부 혹은 숙제 하기
모처럼 아이들 5명이 뭉쳤으니, 아버님을 찾아 뵙자고 제안한 큰올케는
밤새 모의운전
하느라 잠을 설치고
나와 아이5명을 태우고 동두천에서 상계동 왕복 운전을 해 냈다.
이 깜짝 방문에
친정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신 것은 물론이고.
당초 일주일 예정이었지만
목~토 2박3일 템플스테이에
아이들을 참가 시키기로 하여 공동육아 기간을 단축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더 길어 졌으면… 음…
수요일 저녁.
제일 어린 녀석은
엄마를 따라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는데
그 뒷모습은 살짝
짠했다.
녀석은 계속 남아
같이 놀고 싶어 했으므로.
목요일 오전.
큰올케는 출근했고
나는 큰동생과 아이 4명을 챙겨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봉선사로 향했다.
점심은 왠지 고기를
먹여야 할 것 같아서 돈까스를 택했고 녀석들은 맛있게 먹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자꾸 쳐다 봤는데, 아마도 아이 넷
부부로 추측한 듯.
아~ 아이 넷 키우는 부부는 이런 시선을 받겠구나.
- 입대 전 아들을 먹이는 심정으로. 돈까스.
템플스테이 입소를
끝으로(이 이야기는 따로) 5박 6일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집에 오니 좋다.
빈집에 혼자 있으니
좋아도 너무 좋다.
돕겠다고 벌인
일이었는데,
큰올케를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많이 미안하고 정말 고맙다.
나 보다 13살이나 어리지만 그녀는 언제나 나 보다 어른스럽다.
“우리 가족이잖아요, 돕고 살아야죠”하는 그녀.
이번에도 그녀에게 한수 배웠다.
독수리오형제가 뭉치면 어른들은 힘들지만 (더 어렸을 때에 비하면
수월한 거지만) 아이들은 즐겁다.
이렇게 즐길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을 터.
누릴 수 있을 때 맘껏 누리게 해 주고 싶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라면서 쌓았던 사촌들과의 추억이 녀석들에게도 남기를 바래본다.
강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