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사용설명서

가족 조회수 7892 추천수 0 2012.07.30 14:26:04


[한겨레 토요판] 가족
남편사용설명서

“왜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 부부싸움 끝에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부부간 갈등의 원인과 치유법을 연구해온 존 그레이 박사는 “본래 남자는 화성인이고 여자는 금성인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언어와 사고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테스토스테론이나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 때문에 여자는 ‘불’ 같고, 남자는 ‘얼음’ 같다고도 했죠. 나와 네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상대를 바라보면 그 눈길이 좀더 고와지진 않을까요?

나를 화나게 하는 아내의 행동이 있다. 악의가 담겨 있진 않다. 내 염장을 지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은 더더욱 아니다. 남들 눈엔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 행동에 나는 화가 난다. 이해 안 돼도 할 수 없다. 아내는 따진다. 왜 그깟 일에 화를 내냐고.

내게 시장이나 마트는 화가 자주 폭발하는 곳이다. 장보기는 간단한 일이다. 대개 집을 나설 땐 살 물건이 정해져 있다. 당연하다. 살 게 있으니 장보러 가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막상 현장에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뭐부터 사지?” “유기농 두부.” ‘지시’에 따라 식품 매대로 가 두부를 카트에 담는다. 그런데 돌아보면 함께 온 사람이 없다. 아내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다른 상품을 보고 있다. “뭐 해?” “응.” 이건 답변이 아니다. 물건에 정신이 팔린 거다. 아내의 손에 들린 상품은 구매 품목 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은 것이다. 실제 사는 경우도 별로 없다. 아내는 그저 여기저기 둘러보고 이 물건 저 물건 집어본다. 이런 상황이 몇번만 반복되면 금세 지치고 화가 난다. “뭐 해?” “빨리 와!” 아내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거칠어진다.

그런데 왜 그 상황에서 화가 날까?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오랜 사유 끝에 얻은 결론은 ‘디엔에이’(DNA)다. 나, 남자다. 100만년 전 돌도끼 들고 공룡과 싸우던 사람이다. 다시 태어나서는 멧돼지나 노루를 잡고, 또다시 세상에 왔을 때는 전쟁터를 누볐다. 사냥이나 전쟁은 집중이 필요한 일. 몸과 마음을 한가지에 집중하는 ‘몰빵’의 디엔에이가 내 안에 있다. 두부를 사러 가면 두부만 사면 된다. 내 눈에 다른 판매대에서 어슬렁거리는 일은 헛힘만 쓰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디엔에이로 돌아가자. 남자는 한번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도록 프로그램돼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여자는 다르다. 원시시대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냥 간 사이 함께 모여 불을 지피고, 음식을 다듬으며, 빨래를 널고, 아이들을 돌봤을 것이다. 멀티태스킹은 그렇게 여자의 디엔에이에 탑재됐다.

장보기할 때 다투지 않으려면 ‘갈라서라’. 남자에겐 구매 목록을 적은 종이만 넘겨주면 된다. 임무는 틀림없이 완수한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싶으면 남자가 좋아하는 주전부리 하나 사서 입에 물려주고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 된다. 먹으면서 화내는 인간은 드물다.

장보기에 대해 한가지 더 말하자면 남자에게 추상적인 지시는 어려운 과제라는 것. “저녁 찬거리 좀 사와.” 이건 논술보다 더 어렵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지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콩나물 한 봉지, 호박 두 개, 시금치 두 단, 파 한 단. 알아서 사오라고 채근하면 불안해지고 화가 난다.

기나긴 쇼핑을 원한다면
앉아서 기다려, 하면 된다
찬거리 좀 알아서 사와?
차라리 논술문제를 내시라

남자는 죄를 져도 ‘폼생폼사’
눈깔고 입닫고 반성중인데
대화로 풀자 하면 화가 난다

‘남자가 화를 내는 상황에 대한 유전학적 분석’을 담은 나의 이론은 다른 사례의 설명에도 유용하다. 설거지가 그렇다. 설거지할 때는 그 일에만 집중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씻을 그릇은 한꺼번에 싱크대에 쌓아 두라.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는 새로운 그릇이나 컵을 싱크대에 빠뜨리는 일이 반복되면, 그릇을 날라다준 사람에게 성질을 내게 된다. 게다가 설거지를 열심히 하는 중에 “그 일 끝나면 빨래도 널어줘”라는 말까지 들리면 꼭지가 돈다. 물론 아내도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화낼 일이 아니다. 그래도 화가 치민다. 내 마음은 벌써 몇번이나 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한번에 한가지씩. 남편사용설명서의 핵심이다.

이런 ‘몰빵’의 멘털은 운전 중에도 나타난다. 운전은 멀티태스킹이다. 집중이 필요하다. 잡담은 집중을 방해하는 ‘노이즈’다. 물이나 담배를 달라면 건네주고 그냥 편하게 쉬시라. 자꾸 말 걸면 짜증만 난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얘기는 운전 중에 하면 안 된다. “그때 여행 갔다 오는 차 안에서 얘기했잖아”라고 타박해봤자 소용없다.

또 하나. 남자에겐 ‘체면’이 중요하다. 후배 부부 얘기가 좋은 사례다. 유럽 여행 중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고함이 오가다 갑자기 후배의 아내가 사라졌다. 후배가 하는 말.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아내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단다. “처가에 가서 뭐라고 설명하지?” 체면이나 위신은 이처럼 남자의 무의식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폼생폼사. 인간성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의 디엔에이에 새겨진 유전형질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체면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미안하다’ 또는 ‘잘못했다’는 표현에 서툴다. 입안에서는 ‘미안해’ ‘잘못했어’ ‘용서해줘’와 같은 말이 맴돌다 못해 소용돌이친다. 그럼에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먼 옛날, 사냥이나 전쟁에서 잘못을 인정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곤 해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남자가 눈을 내리깔거나 침묵하면 잘못을 인정한다는 표시다. 입 닫고 반성중인데 “넌 왜 잘못했으면서 미안하다는 얘기조차 하지 않냐”고 채근하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난다. 한두번은 참는다. 닦달이 계속되면 마침내 소리를 지르게 된다. “그래, 미안하다. 됐어?”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미안하다면서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끝으로, 스킨십과 관련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난 머리 만지는 것은 질색이다. 아주 드물지만 아내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가 있다. ‘어? 이건 뭐지? 나, 펫?’ 영화에선 조폭이 아랫사람을 다룰 때 머리를 때린다. 각목이나 쇠파이프가 아니라 손바닥이나 플라스틱 자, 공책 등 좀 자질구레한 용품이 구타 도구다. 맞는 사람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통증보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경상도에서는 이때 때리는 놈 입에서 이런 멘트가 나온다. “너 어디 아프냐?” 박근혜 의원의 “병 걸리셨어요?”라는 말이 등장하는 시추에이션은 바로 이거다. 아무튼 머리는 남자에게 예민한 곳이다. 가급적 손대지 말라. 성감대도 아니지 않은가.

화는 내는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화를 내고 나면 늘 후회가 된다. 기분 더럽다. 이 불뚝성을 어찌하나. 나이가 더 들어 테스토스테론 분비량이 확 줄고 에스트로겐이 마구 솟아날 때가 되면 바뀔지도 모른다. 남자, 잘 쓰면 나름 유용하다. 화 안 나게 잘 써주기를 부탁한다.

한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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