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21384_P_0.JPG » 한겨레 사진 자료


고미숙의 책은 처음이다. 

나는 수유너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내겐 그 연구 집단도 완전히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이라는 느낌보다는 '(돈)좀 있고 (뭘)좀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현학적인 공간'의 느낌이 강해서다. 관심은 있었지만 내가 발을 들여놓기엔 물질적/시간적 제약이 제법 컸기 때문에 거리감이랄까, 거부감이랄까 하는 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강연 한 번, 책 한 권 읽지 않고 무작정 거리감을 갖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 기회가 되면 그들의 책을 읽어보리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기회가 난 엄마다 님을 통해서 왔다. 즐겁게 읽었다. 새로운 내용이랄 건 없었지만, 고미숙과 나의 닮은 점을 찾게 해 준, 그리하여 고미숙 개인과 수유너머라는 공동체에 대해 약간이나마 경계를 풀게 해 준 책이었다. 


1. 교수와 선생, 프로페서와 스칼라

고미숙은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다 4학년 때 듣게 된 국어고전문학 관련 강의로 인해 진로가 확 바뀌었다고 했는데, 나도 비슷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영어를 좋아해서 통번역사로 진로를 잡아 대학에서도 영어통번역 전공을 했다. 그런데 2학년 말부터 듣기 시작한 영문학 강의에서 뭔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대학원에 진학해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석사를 끝낼 때 쯤 되니 공부를 꼭 학교 안에서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유학 준비과정도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점차 학교, 학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굳이 학교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선생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학교를 벗어나 책과 강연, 나와 타인의 삶과 노동의 현장을 통해서 '살아 있는 지식,' '진짜 선생'을 만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는 '교수'는 많지만 '스승'은 별로 없었고, 처세와 실적 올리기에 능해 '프로' 냄새 물씬 나는 '프로페서'는 많지만 공부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우쳐 주는 '학자'는 별로 없었다. 나를 영문학의 길로 이끈 내 대학 시절 은사님은 내게 처음으로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해 준 분이었다. 도서관에서 책 여러 권을 쌓아 놓고 뒤적뒤적 읽고 뜻을 음미해가며 '생각'이란 걸 하게 해 준 분이었다. 그리고 그 분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교가 아니어도 공부할 곳은 천지에 널렸고, 강의 교재가 아니어도 공부할 것 역시 널려있다. 어딜 가든, 무얼 하고 살든 늘 공부해라" 


2. 세미나, 홀로 세미나, 그리고 베이비트리 

고미숙은 또한 세미나를 중시한다. 나 역시 이십대 중반 이후 서너 팀의 세미나 팀을 거쳐 내 공부를 다져왔다. 뜻이 통하는 선/후배/동학들과 하나의 책, 한 명의 저자, 하나의 주제를 놓고 공부하는 기쁨은 읽기와 발제 등 세미나 준비에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다가온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실은 (어영부영 한두 달 하다 끝난) 세미나를 통해서였고, 석사 졸업 후 미국 오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과 두 팀의 세미나에 참여했으며, 여기 와서도 이곳 대학생/대학원생/교수로 이루어진 세미나에 참여했다. 생각이 거칠고 글 호흡이 짧아 세미나 발제 준비를 하면 늘 책 요약 수준밖에 못해서 참 아쉬웠는데, 이런 저런 세미나를 통해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나를 볼 때 뿌듯해진다. 공부는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남들이, 전 세대가 쌓아 놓은 건물 꼭대기에 내 벽돌 하나 얹는 것, 그것이 공부다. 그래서 내 벽돌 위에 또 다른 이들이 벽돌 하나 더 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공부다. 고미숙이 마지막에 '공부해서 남 주자'고 한 얘기도 그런 뜻일거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 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여건이 안 된다는 사실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 시간을 나는 '홀로 세미나'를 하며 견뎌왔다. 하워드 진의 책을 따라 읽고, 이러저러한 공부거리를 찾아두고, 베이비트리에 글을 쓰면서. 이제 나의 새로운 세미나가 시작된 것 같다. 베이비트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런 프로젝트가 내겐 여럿이 함께 하는 세미나의 재개를 의미한다. 


3. 일리히, 맑스, 엠마 골드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즐거웠던 때는, 내가 의미있게 생각하는 사람, 내가 나의 '선생'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과 그들의 말이 등장할 때였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구절들이 곳곳에 인용되어 있어 정말 반가웠다.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는 친구들과 세미나 하면서 읽었던 책이라 내 개인 블로그에 발제문이 아직 남아 있어서 이참에 다시 꺼내 읽어봤다.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는 또다른 세미나에서 처음 접한, 나를 맑스에게로 이끌어 준 결정적이고도 충격적인 저작이었다. 특히 고미숙이 인용한 바로 그 대목! 내가 맑스에게 반한(?!) 지점이 바로 그 대목이 아니었던가. <공산당 선언>을 쓴 그 무시무시한 '빨갱이'가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라는 이런 낭만적이고도 이상적인 얘길 했다니. 그리고 언젠가 우연히 알게 된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엠마 골드만의 말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 내가 '이것을 계속 해야 하는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할 때 가장 명확하게 답을 내려주는 지표가 되지 않았던가. 


고미숙의 책은 이렇게 나를 다시금 이 반가운 선생들 앞에 서게 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그것도 아픈 구석 하나 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된 '케이티의 엄마'라는 이름의 운명 앞에서 무너지려고 할 때 나를 붙든 것은 어쩌면 이 사람들을 비롯해 내가 그동안 만나온 '선생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부와 글쓰기가 가진 힘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것이 내가 공부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내 새로운 공부는 당분간 이 '엄마'라는 운명 덕분에 알게 된 이 공간, 베이비트리에서 이어지게 될 것 같다. 


---

다음 책 제안: 일리히가 자주 언급되었으니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도 괜찮을 것 같고, 아니면 고전 읽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고미숙이 열하일기 풀어 썼다는 그 책, 읽어보신 분 있나요? 의견 부탁드려요.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260281/f3e/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336 [자유글] 두번째 책 '두려움없이 엄마되기'를 받고 [8] ubin25 2012-03-06 4821
335 [자유글] 제 개인정보 중국까지 넘어갔나봐요 ㅠㅠ imagefile [2] guk8415 2012-03-06 4956
334 [자유글] 아이쿠! 엄마가 또 몰랐구낭~ imagefile [3] blue029 2012-03-06 5492
333 [자유글] 기다려주기 [6] 분홍구름 2012-03-06 4738
332 [자유글] “1은 세상에 단 하나, 하나뿐인 거예요” imagefile [2] sano2 2012-03-05 6367
331 [자유글] 서천석 샘 트윗 - 선행학습, 학습공간 등 image [3] sano2 2012-02-28 13315
330 [자유글] 너, 야구 했냐? [4] 강모씨 2012-02-28 5177
329 [자유글] 개똥이 사진 전시회(?) imagefile [1] 강모씨 2012-02-24 4985
328 [자유글] 한국 사람 반틈 영국 사람 반틈 그래서 절반이 아닌 하나입니다. [2] kimharyun 2012-02-24 6301
327 [자유글] 선생님은 왜 울고 있지? [2] sejk03 2012-02-23 6496
326 [자유글] 아흑, 수면교육 movie [11] anna8078 2012-02-23 7337
325 [자유글] 애가 밥을 너무 안먹어 변비... daryong7 2012-02-23 4621
324 [자유글] 내 밥 챙겨 먹는 건 왜 이리 귀찮을까..? [10] sejk03 2012-02-22 5245
323 [자유글] 네 살에서 다섯 살로... 엄마가 따라가기 바쁘다 바빠 imagefile [9] blue029 2012-02-22 6222
322 [자유글] 케이블 스토리온에 출연한 뽀뇨아빠 movie guk8415 2012-02-21 8034
321 [자유글] 포.대.기.... 전 정말 힘들던데 imagemoviefile [4] anna8078 2012-02-20 16316
320 [자유글] 22개월, 눈썰매를 즐기기엔... [4] 강모씨 2012-02-20 4817
319 [자유글] 꼬맹이 진급하는데 왜 엄마 맘이..? [2] sejk03 2012-02-17 4547
318 [자유글] 기대되는 주말 친구들 모임~ imagefile [5] jsbyul 2012-02-17 5367
317 [자유글] 서천석 선생님 학습에 관한 트윗 연재 imagefile [3] sano2 2012-02-17 10657

인기글

최신댓글

Q.아기기 눈을깜박여요

안녕하세요아기눈으로인해 상담남깁니다20일후면 8개월이 되는 아기입니다점점 나아지겠지 하고 있었는데 8개월인 지금까...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