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첫 돌이 지나니 서서히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무엇을… 말인고 하니, 바로 '산후건망증'이라는 녀석 말이다.
그 증세가 의학적으로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없지만,
주변에 아이 낳은 선배들이나 친구들 치고 이 얘기를 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짜 장난 아니야."
"생일은커녕 전화번호도 깜빡할 때가 있더라니까."
"이러다 정말 큰일 한번 나겠다 싶어."
산후건망증, 혹은 산후깜빡증이라고 불리는 이 증세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깃거리 중 절대 빠지지 않는 주제다.
(대체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주변엔 '산후깜빡증'을 앓는 이가 정말 많다.)
그때마다 나는 '설마, 아이 낳았다고 뭐 진짜 그럴까.' 싶은 의구심이 있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아닐 거야' 하는 자만심까지.
기억력 하나는 좋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기억력이 성적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좌절도 많이 했지만,
(잡다하고 산만한 기억이 많은 데 비해 집중력은 좀 많이 떨어진다.)
어쨌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기억들을 비상약처럼 지니고 살던 나였다.
(글과 딱히 어울릴 만한 사진이 없는 관계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
친구들 모임에서도 예전 이야기를 하다가,
"그 호프집 이름이 뭐였지?"
"그때가 언제였더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나는 은근슬쩍 미소를 짓고 슬쩍 입을 뗀다.
"거기, 00호프."
"우리 3학년 때, 축제 둘째 날이니까 10월 00일."
회사에서도 회의를 하다가,
"우리 그 회의 언제하기로 했었지?"
"합정역 몇 번 출구에서 몇 시에 보기로 했더라?"
선배와 동료와 상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나는 조심스레 말문을 연다.
"다음 주 월요일 주간회의 끝나고 바로요."
"5번 출구 앞 자전거포에서 3시까지 가기로 했어요."
크게 대단할 건 없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잘한 도움이 되어 준 기억력이었기에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고 정신없이 지내는 내게 은근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산후건망증이 내겐 해당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돌이 지나면서 하윤이가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만큼
나도 하루하루 다르게 노화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노화의 한가운데 바로 그 '산후건망증'이 놓여 있는 것 같다.
지난 일 년은 잠복기였던 것 마냥 깜빡 깜빡 하는 증세가 급속도로 진행 중이다.
오죽하면 요즘 내가 회사에서 제일 많이 내뱉는 말들의 대부분이 이렇다.
"아, 맞다!"
"아참! 바로 처리할게요."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ㅠ"
참 이상하다. 왜 갑자기 자주 뭔가를 잊어버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주변의 '선배 엄마들'이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정체불명의 산후건망증을 자연스레 겪고 있는 걸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더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실은 엄청난 착각이었던 걸까?
어느새 산후건망증이라는 비겁한 변명을 앞세워,
회사 선배와 상사에게, 거래처 담당자 등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나 자신이 슬프고도 웃긴데
이것이 또 하나의 수다가 되어 친구들과, 선배들과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렇게 까먹고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다 기억하고 다 챙기고 살면, 그건 정말 '사람이 아니무니다'다.
나 자신만 챙기기에도 하루가 모자란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여러 역할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분명하게 놓여 있다.
엄마로, 아내로, 딸로, 며느리로, 세입자로, 대리로, 각각의 역할에 주어진 일들이 있다.
식구들 생일, 양가의 경조사, 관리비, 도시가스요금 납부일, 각종 보험 등의 청구서,
이유식, 예방접종일, 아이의 콧속 귓속 손발톱 체크, 빨래, 설거지, 청소….
이 모든 걸 혼자 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이기에, 아내이기에, 며느리이기에 책임감이 많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산후건망증'은 정체불명의 곤란한 증세가 아니라, 꽉 찬 머릿속의 작은 쉼표가 아닐까.
잠깐이라도 뭔가를 잊을 수 있도록,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비워 낼 수 있도록,
의도치 않게 정말 완벽하게 '까먹어 버린' 한순간, 오롯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과장스러운 해석일지도 모르겠으나…
뭔가를 잊어버리고 뒤늦게 알아차려서 겪었던 재미난 여러 경험담을 듣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별것 아니지만, 힘있는 공감과 위로가 전해져 오고 묘한 연대감까지 느껴졌다.
여러 '갑'들에게 비굴해져야 하는 상황들이 있기는 해도…
이 정체불명의 건망증으로 인해 삶이 우울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트콤처럼 엉뚱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 괜찮다!
한숨 푹 내려놓고 나서는 내게, 한 선배가 어깨를 툭 치며 빙긋 웃는다.
"근데 그거.. 깜빡하는 거.. 40대 되면 더 심해진다!"
…… 흠.
어쨌든 이제부터 견과류를 부지런히 챙겨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