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1년 넘게 아내에게 숨겨야 했던 비밀이 한 가지 있다.
바로 4년 전 오늘은 아내에게 비밀로 해야 했던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2009년 5월 27일, 내가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시작한 지 
세 달이 가까워오고 있던 날이었다.
그땐, 지금 사는 데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동네에 살고 있었다.
아이도 신영이 한 명뿐이었다. 
당시 신영이는 우리 나이로는 세 살, 정확히는 21개월이었다.

그해 5월엔 좋은 소식과 슬픈 소식을 번갈아 듣게 되었다.
5월 17일, 새벽에 자가 임신 진단기로 검사를 해본 아내는 
나에게 둘째 임신 사실을 알렸다.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해보니 임신이 맞았다.
둘째 임신 사실을 알고 기뻐하던 우리는 며칠 뒤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자동차 검사를 마치고, 아이들 소아과에 갔는데,
간호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벽에서 떨어졌대요.'라고 말했다.
처음엔 장난이나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료를 마치고 차에서 라디오를 켜자 계속해서 속보가 전해졌고,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어서
그 뒤 며칠은 신영이와 집에 함께 있긴 했지만, 
뉴스를 보거나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생각하면서 멍하니 지냈다.


그렇게 망연자실한 채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5월 27일에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날은 임신 초기의 아내가 야근까지 해야 한다기에
아내를 직장까지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왔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들을 하고, 신영이와 좀 놀다가 점심까지 먹인 뒤 
신영이는 낮잠을 재웠다.
신영이가 자는 사이 나는 옆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서거와 관련된 분석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영이가 잠든 안방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방 문을 열고 쳐다보니 신영이는 바닥 이불 위에서 잘 자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뭔가 떨어질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히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기에
방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TV를 보는 순간 난 기겁을 했다.
(지금 다시 그때를 생각하니 심장이 벌렁벌렁해진다.)
TV 위에는 뱀이 있었다!
잠시 후 뱀은 TV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헉!
난 하얗게 겁에 질렸다.
자고 있는 신영이를 얼른 안고 나와 옆방에 옮겼다.
너무 놀라 당황한 상태였지만, 
머릿 속으론 '어떡하지? 뭘 해야 하지?' 계속 생각했다.
부리나케 집 앞 정자로 갔다.
정자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매일 화투놀이를 하시기 때문이다.
가서 할머니들께 '방안에 뱀이 들어왔어요. 어떻게 해야 되죠?'하고
다급한 상황을 말씀드렸다.


정자엔 너댓 분의 할머니들이 게셨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내 말을 듣고 다들 한 말씀씩 하셨다.
"아니, 어떻게 뱀이 방에 들어왔으까?"
"아, 진 것이 어딘들 못 가?"
"나도 옛날에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어깨가 선득해서 쳐다보니 뱀 아녀?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들고 있던 호멩이(호미)로 확 쳐내버렸어."
"배암은 보기만 해도 징그러. 나도 밭에서 뱀을 본 적 있는데..."
그렇게 할머니들은 당신들이 예전에 뱀을 만난 일을 얘기하고 계셨다.
난 어이가 없었다. 
'지금 한가하게 뱀 만난 옛날 일을 얘기할 때가 아니라구요!'
마음이 급해졌다.
할머니들께 도움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싶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했다.
"할머니, 집에 있는 대나무 장대로라도 어떻게 해봐야겠어요."

장대를 들고 방문을 열 때쯤엔 할머니들도 내 뒤에 따라와 서 계셨다.
뱀은 바닥에 없었다.
조심스레 가구들을 잡아당겨 보았다.
TV와 오디오를 잡아당기자 벽 한쪽의 오목한 곳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식은 땀이 났다.
'장대로 건드렸을 때 내 쪽으로 몸을 던져 공격해오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무서웠다.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지만 동네 친구들이나 형들이 뱀을 잡아 가지고 놀 때도
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이였다.
뱀은 징그럽고 끔찍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장대로 뱀을 쫓아내야 하는 것이다.
'침착하게 하자.'
마음을 간신히 다잡아 장대를 뱀 쪽으로 가져갔다.
그때도 할머니들은 내 뒤에서 '저기저기 뱀이 몸을 꼬고 있는 것 좀 봐.',
'아이고, 징그러워.'하며 한 마디씩 말로만 거들 뿐이었다.


다행히 뱀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대로 뱀의 몸 가운데를 들어올리자 힘을 주어 장대에 매달렸다.
얼른 창문을 열어 밖으로 내던졌다.
뱀을 내보내자 할머니들은 뱀이 어떻게 들어왔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생각해보니 창밖 벽쪽에 장작들을 쌓아두었고,
날이 더워 창문을 10센치 정도 열고 있었다.
아마 뱀은 장작을 타고 올라와 열린 창문 틈으로 기어왔다가 
창틀에서 TV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옆방에 있던 내가 들은 건 바로 그 소리였을 것이다.

뱀이 방에 들어왔던 이상 방을 그대로 둘 순 없었다.
뱀의 몸에는 기생충도 득실거린다는데...
신영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얼른 청소를 해야 했다.
수세미에 주방 세제를 묻혀서 방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한 번으론 찜찜해서 여러 번 문질러 청소한 뒤 다시 걸레질을 했다.
'휴우...'


청소를 마칠 때까지 다행히 신영이는 자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이 사실을 아내가 알면 안 된다!'
임신한 아내가 이걸 알면 너무 놀랄 것이기에 이 사실을 아내가 몰라야 했다.
얼른 다시 정자로 나가 할머니들께 부탁을 드렸다.
"할머니, 오늘 뱀 나왔던 건 애기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내가 둘째를 가졌거든요."
그러자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럼, 그럼. 말하면 안 되지. 걱정 마.' 그러신다.


다음 날엔 신영이가 낮잠 든 사이에 
창밖 벽에 붙어 있던 장작들을 
벽으로부터 1미터 정도 간격을 띄워 옮기는 일을 했다.
꽤 많은 양이었는데, 혼자서 다 했던 건 
나도 모르는 괴력이 어딘가에서 나왔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 딸과 아내의 안전을 생각하니 그런 힘이 나왔을 것이다.


당시 나는 조그만 수첩에 육아 이야기를 메모해두고 있었는데,
이날 일은 쓸 수가 없었다.
아내가 알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유아휴직 중에 일어난 이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역사교사인 내가
어떻게 기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고민 끝에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뱀을 그려놓으면 
아내가 수첩을 보고 '이건 뭐야?'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뱀을 그리고 양 옆으로 날개처럼 보이는 걸 그려넣었다.
그러자 날아가는 새 같기도 했다.
그건 나만 알 수 있는 표식이었다. 
'이건 뱀이다. 이날 뱀이 방 안에 들어왔다.'
크기변환_육아수첩 뱀 그림(20090527).JPG

비밀을 안고 산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그리고 비밀은 그 강도가 클수록 
그걸 말하지 않고 견뎌야 하는 일의 버거움도 큰 것 같다.
더구나 이 일은 직접 목격한 할머니들과 나의 엄마만 알고 있었다.
이 놀라운 일을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지내기란 너무 힘들었다.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는 말을 해야 나도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한테만 그 일을 말했고,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외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일 년 넘게 이 사실을 숨겼다.
다음 해 1월, 둘째 선율이가 태어났지만 아이가 백일도 안 되어 
그 일을 말하는 것도 뭔가 찜찜했다.
그래서 둘째 백일이 한참 지나고,
그 사건이 있고 1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아내는 아주 놀라면서도 
내가 그 사건을 말하지 않고 여태껏 참아왔던 걸 재미있어 했다.
"내가 이걸 말 못하고 지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나 정말 힘들었다고!"

삼국유사와 그리스 신화 모두에 나온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 속 주인공도 죽기 전에는
숲에 들어가 그 사실을 말하고 만다.
동서고금 할 것 없이 비밀을 말하지 않고 살기란 그처럼 어려운 것인가 보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3287 [자유글] 워킹맘 사직서엔…“인사불이익·야근 힘들어” imagefile babytree 2010-09-10 19985
3286 [자유글] “내 아기 육아정보 이 ‘앱’ 하나면 끝!” imagefile babytree 2011-08-03 19934
3285 [자유글] `우유 고르는 것도 쉽지 않네'... 현명한 우유 선택법 imagefile 양선아 2010-05-25 19768
3284 [자유글] 7박 8일 시댁에서의 휴가 -.-;; imagefile [12] blue029 2012-08-12 19562
3283 [나들이] [이벤트 참가] 박물관 앞에서 뛰어! imagefile [2] wonibros 2011-12-07 19065
3282 고3 수험생들 '꼿꼿한 자세'잃지 마세요 imagefile babytree 2010-11-09 19010
3281 위 역류 의심되면, 먹고 바로 눕지 말고 허리띠 느슨하게 imagefile babytree 2010-08-17 18944
3280 [나들이] 수업시간표와 학교, 행복한 학교란 없는 걸까요? imagefile [1] wonibros 2011-11-09 18930
3279 [자유글] 프랑스 엄마들이 우월한 이유 imagefile [6] sano2 2012-02-13 18909
3278 [가족] [토토로네 감성육아] 택배와 함께 온 엄마의 골판지 편지 imagefile [8] pororo0308 2014-12-18 18903
3277 근육량 적은 노인, 당뇨·고혈압 가능성 높다 imagefile babytree 2010-07-20 18823
3276 내몸의 물혹 사고칠 확률 얼마나? imagefile babytree 2010-04-29 18807
3275 [자유글] 건우야, 아빠가 ‘집’은 장만했단다 imagefile trustjoon 2010-11-03 18737
3274 [자유글] [이벤트 공지] 엄마표 장난감 자랑하세요 imagefile babytree 2010-10-28 18659
3273 [살림] 김장, 시어머니엔 집안행사…며느리엔 생고생? image 베이비트리 2011-11-17 18649
3272 [자유글] 딸 머리 잘 묶어주시나요? imagefile [4] 양선아 2011-11-22 18399
3271 [나들이] [딸과 함께한 별이야기 5] 네번째 관측 - 목성을 보다 (성연이 망원경이 생기다) imagefile [5] i29i29 2013-09-13 18322
3270 [나들이] 개똥이 친구의 집은 제주민박 유월인가? imagefile [14] 강모씨 2012-10-25 18239
3269 [나들이] '구름빵' 보고 구름빵 먹고 구름빵이랑 자요 imagefile [4] yahori 2012-01-17 18170
» [가족] 1년 넘게 아내에게 말 못한 비밀 하나 imagefile [9] 박상민 2013-05-27 18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