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라푼젤."

가족 조회수 9643 추천수 0 2013.06.11 03:19:28
유치원의 원아 수첩에 언어전달란이 있다.
유치원 끝나기 전에 선생님께서 그날 활동과 관련된 어떤 단어를 얘기해주시면
아이가 집에 와서 그걸 부모에게 얘기해주는 거다.
그런데 가끔 아이들이 엉뚱한 단어를 전달해서 웃게 될 때가 종종 있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언어 전달이 뭔지 물었더니
둘 다 "암바"라고 답을 했다.
발레 시간에 배운 동작이라며 내 앞에서 
'암바' 외에도 '아나방', '알라스코', '알롱제' 동작까지 직접 보여주었다.
"아, 발레에서 그렇게 하는 걸 '암바'라고 하는구나?"
하고 대꾸해주며 원아 수첩에  '암바'라고 써서 보냈다.

다음날 수첩을 열어 보니 '암바'라고 써 보낸 것 밑에
선생님께서 '앙바(발레에서 손의 낮은 자세임)'라고 써주신 게 보였다.
아이들은 '앙바'를 '암바'라고 듣고 온 것이었다.
"신영이, 선율이가 어제 언어 전달 '암바'라고 말했잖아?
그거 선생님께서 '앙바'라고 다시 써주셨네?
'앙바'라고 하는 게 맞나 봐.
그래도 '암바'를 잘 기억하고 언어 전달했다고 선생님께서 도장 찍어주셨어."


며칠 뒤 조카가 유치원 끝나자마자 놀러왔는데, 나한테 언어 전달을 말해주었다.
"삼촌, 언어 전달, 공룡이에요. 공룡."
"아, 공룡이야? 삼촌이 적어줄까?" 
'공룡'을 적어주려고 조카의 수첩을 펼치자 
이틀 전 언어전달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안마.'
나는 웃으며 조카에게 말했다.
"OO이는 '안마'라고 썼구나. 신영이 언니랑 선율이는 '암바'라고 썼는데."
그 말을 들은 신영이가 한 마디를 보탰다.
"아, 나도 처음엔 '악마'라고 들렸어. 그랬다가 나중에 '암바'라고 들은 거야."
"하하하. 그랬어?"
'아이들 귀에는 '앙바'가 '악마'로도 들리고, '암바'나 '안마'로도 들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두 주 전에는 자기 꿈을 말해서 적어오는 언어 전달이 있었다.
신영이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아빠, 내 꿈은 화가야."하며, 
원아수첩을 꺼내더니 '화가'라 썼다.
작년에는 요리사가 꿈이었는데, 올핸 화가로 바뀌었나 보다.
"신영이는 화가가 되고 싶어? 화가가 되어서 뭐가 하고 싶은데?"
"화가가 돼서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화가가 되고 싶은 거구나.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공주 그림이랑 폴리, 로이 같은 거."
"그래, 신영이는 공주 그리는 거 좋아하지? 폴리, 로이도 그리고 싶어?"
"응."

"선율아, 선율이 꿈은 뭐야?"
"난 라푼젤!"
"어? 선율이 꿈은 라푼젤이야?"
"응. 난 라푼젤 될 거야."
"라푼젤이 되면 뭐가 좋을 것 같아?"
"라푼젤은 머리가 길잖아. 엄마가 머리 자르라 해서 안 좋아. 머리가 안 길어. 
머리 기를 거야."
"아, 머리를 더 길게 기르고 싶어?"
"응."

선율이의 생각이 귀여워서 웃었다.
퇴근하고 온 아내도 원아 수첩에 '라푼젤(이게 선율이 소원이래요.)'라고 적힌 걸 보고 까르르 웃었다.
다음 날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온 뒤 원아수첩을 보니 
선생님께서 언어전달 밑에 댓글을 달아주셨다.
"ㅋㅋ... 어제 한참 웃었답니다.^^"


'라푼젤' 일화를 몇 사람에게 얘기해주다 보니
얼마 전 신문의 어린이책 소개 코너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났다.
학교 다니는 아이가 자기소개서를 가져왔는데, 
부모가 써야 하는 내용의 첫 번째 물음이 
"아이가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세요?"여서 신선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그 글을 읽으면서 부모로서, 교사로서 두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부모로서 해본 생각은 '내 아이들은 어떤 아이로 자라면 좋을까?'였다.
이 질문은 어떤 직업을 가지길 바라느냐가 아닌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느냐를 묻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내 아이들이 어떤 아이가 되면 좋을까? 
나는 아이들이 어떤 가치를 품고 살아가길 바라나?' 생각해보았다.
균형과 조화, 용기, 협동심, 행복, 자존감 등 여러 가지 좋은 품성들이 떠올랐다.
부모인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가치들을 우리 아이가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세요?'라는 물음은 
교사이기 이전에 부모로서 내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좋은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아이가 갖길 바라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던 소중한 경험을 
나에게 배우는 아이의 부모들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년에 복직하면 나도 이 물음을 자기소개서에 넣어봐야지.'하고 마음먹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의 부모들도 이 질문에 답하면서 
다양한 가치와 품성들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꿈과 가치, 품성 같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2년 전 조벽 교수의 강의에서 들은 내용이다.
조벽 교수는 어떤 화가의 그림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림 속에는 한 화가가 탁자 위의 알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조벽 교수는 그림 속 화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지운 사진을 보여준 뒤 물었다.
'이 화가는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요?'

그림 속 화가가 그린 건 탁자 위의 알이 아닌 독수리였다.
알을 보면서 독수리를 그리는 화가라니...
그 상상력이 놀라웠다.
조벽 교수는 알을 보면서 독수리를 그리고 있는 화가를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원래 그림을 보여준 뒤 다시 물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나 학생들을 보고 무슨 그림을 그리고 계세요?
종이에 한 번 써보세요."
이 질문을 듣고
'나는 내 아이나 나에게 배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앞으로 좀 더 아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자.'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마그리트_알을 보고 독수리 그리는 그림.jpg
(그림 출처: 마나의 노래 네이버 블로그. 이 작품의 제목은 '통찰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벽 교수의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방금 전에 쓴 걸 찢어버리라고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들의 꿈은 우리가 그리는 거 아니에요.
그들이 직접 그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에요.
그래야 꿈이 희망이 되요."


알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그 알의 미래를 그린 마그리트도 놀라웠지만
아이를 보고 부모나 교사가 그리는 그림 대신 
아이가 직접 자기 꿈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라는 조벽 교수의 메시지는 
더욱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애니메이션에서 
라푼젤은 마녀 엄마의 바람대로가 아닌 자신의 꿈을 찾아나서는 캐릭터다.
꿈이 라푼젤인 선율이도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개척해가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
우리집 '긍정의 아이콘' 선율이에게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보인다.
내게도 알에서 독수리를 보는 눈이 생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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