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강원도로 2박 3일간 수학 여행을 갔다.

3일 동안 아이 셋과 보내게 되었다.



첫째 날.

아침 7시, 아내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왔다.

차가 한 대라 3일 동안 차를 내가 쓰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울지 않고 잘 있어주었다.

여느 날처럼 신영이와 선율이는 유치원에 갔고,

수현이와 집에서 보냈다.



오후 4시 50분 신영, 선율이가 유치원에서 오자마자 장보러 마트에 갔다.

오른손으로 수현이를 안고, 왼손으로 선율이 손을 잡았다.

신영이는 장 볼 것을 적은 포스트잇을 들고 혼자 걸었다.

닭고기 한 팩, 단호박, 아기 치즈, 과자, 참외 한 봉지, 바나나 한 팩, 방울토마토 한 팩,

그리고 유치원 선생님들께 드릴 선물용 음료수 12개 들이 한 상자를

바구니에 담아 들고 수현이까지 안고 다니려니 무거웠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자 계산원 아주머니께서

"너희들 많이 컸구나." 하며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신다.

나를 보면서는 "얘가 막내예요? 엄마를 닮았네." 하시며

수현이에게 관심을 보이신다.



집에 도착하니 신영이는 놀다 오겠다며 나갔다.

그때 시간이 5시 반. 6시까지 놀다 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수현이 이유식과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배고파 우는 수현이의 이유식을 먹이면서 저녁 반찬을 바쁘게 만드는 사이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신영이가 돌아오기로 약속한 6시에서 한 시간이 지난 7시가 되었다.

선율이 먼저 저녁을 먹이는 동안 신영이가 왔다.

어제도 약속 시간보다 늦게 들어왔는데, 오늘 또 늦었다.

손을 씻게 한 뒤 '늦어서 걱정했다.

아빠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랑 노는 게 재미있어서

옆동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할아버지하고, 담임 선생님한테 엄청나게 혼난 적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놀다가 늦게 되면 다시 와서 아빠한테 허락받고 놀러 가야 하는 거다.'

하고 심각하게 얘기했다.

저녁을 먹고 나자 신영이는

'언니오빠들이랑 저녁 먹고 또 만나서 놀기로 했다'면서 나가도 되냐고 묻는다.

하긴 날이 이렇게 풀렸는데, 그동안 바깥에서 많이 못 놀긴 했다.

놀다 오라고 했다. 대신 8시까지는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저녁 먹은 걸 설거지했다.

이유식과 요리 몇 가지를 했더니 냄비까지 여러 개 나와 설거지거리가 제법 많았다.

8시 20분쯤 설거지를 마치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선율이가 먼저 받더니 '엄마 보고 싶어.' 한다.

아내가 선율이에게 언니도 바꿔달라고 하자

선율이는 '신영이 언니, 밖에 놀러 갔어요.' 한다.

아내는 내게 '신영이가 너무 늦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들어오면 문자로 연락해달라고 한다.

'나도 신영이가 어제도 늦고, 오늘도 두 번이나 늦어서

들어오면 얘기 좀 할 생각이야.'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선율이가 "엄마가 없으니까 무서워. 엄마 보고 싶어." 하며

울기 시작한다.

한 손으로 수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우는 선율이의 손을 잡고 신영이를 찾으러 나섰다.

신영이보다 한 살 많은 OO 언니네 집 거실 안에 아이들 여럿이 모여 있는 게 보인다.

동네 아이들 여러 명이 거기 모여 있었다.

신영이는 나를 보자마자 '카네이션 만들고 있었어.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그런다.

OO네 엄마가 '내가 긴 바늘 12로 갔을 때 알려주었잖아.' 하신다.

집에 들어오는 신영이에게

"신영이는 손 씻고, 바닥에 좀 앉아봐."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영아, 아빠가 엄청 걱정했어. 그리고 아빠 지금 화가 많이 났어.

아까 네가 늦었을 때 아빠가 말했잖아.

약속 시간보다 늦을 것 같으면 아빠 허락을 다시 받고 가서 놀아야 한다고.

그런데 신영이는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었어.

그러면 아빠가 신영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있는지 어떻게 알아?

혹시 나쁜 사람이 나쁜 맘 먹고 신영이를 데려가도

아빠는 20분이나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던 거잖아.

찾을 방법도 없고."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는지

신영이는 가만히 앉아서 듣다가 '카네이션을 다 못 만들어서.' 그런다.

신영이가 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여전히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화가 난 척,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바닥을 탁 치면서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못 만들었어도 시간이 다 되었으면 아빠한테 다시 연락을 했어야지.

OO네 집 안에 있었던 거니까 전화를 하든지

아니면 아빠한테 와서 얘길 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무 연락도 안하고 늦었으면서 다 못해서 늦은 거라고 말하고 있어?"

그러자 신영이가 펑펑 울기 시작한다.

"아빠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고, 앞으로 신영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봐."

울먹이면서 간신히 "늦어서."라길래

"맞아. 그런데 그냥 늦어서가 아니야.

약속한 시간보다 늦었는데, 연락도 없이 늦어서 화난 거야.

그리고 신영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어?"

"늦으면 연락해야 되요."

나는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바꾸고 말을 이었다.

"그래. 약속한 시간 안에 와야 하고, 늦을 것 같으면 다시 허락을 받아야 해.

우리 신영이는 그동안 약속 잘 지켜왔잖아.

앞으로 잘 할 수 있을 거야."

신영이가 혼나는 동안 수현이와 선율이는 내 앞에 안기듯이 앉아서 가만히 있었다.

신영, 선율, 수현이에게

"우리 딸들, 아들, 엄마 수학여행 간 동안 아빠랑 있어야 하는데,

엄마 보고 싶지? 아빠가 안아줄까?"

그랬더니 신영이와 선율이는 엉엉 운다.

그렇게 한참을 안아주고 시계를 보니 8시 50분이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잘 시간이다.

"자, 신영이, 선율이는 갈아입을 옷 가져오고, 씻을 준비하자. 너무 늦었다."



아이들 씻기고, 유치원 수첩에 '언어 전달'을 쓰려고 하니

신영이가 오늘은 숙제가 있다고 한다.

안전에 관한 동요의 가사를 바꿔가는 것이었다.

신영이에게 빈 종이에 원래 가사와 신영이가 바꾼 가사를 쓰게 하고,

쓰고 나면 원아 수첩에 써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수첩을 폈는데, 오늘 날짜가 14일이다.

'앗, 스승의 날!'

순간 아차 싶었다.

"신영아, 아까 OO네에서 카네이션 만든 거 혹시 스승의 날 선생님께 드릴 거였어?"

"응."

아뿔싸,

스승의 날 선물로 선생님께 드릴 카네이션을 아이들이 모여서 만들고 있었던 거다.

그게 다 완성되지 않아 집에 못 오고 있었던 거다.

순간, 신영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는 아쉬운 마음이 생겼다.

자책하고 싶진 않았다.

신영이의 밤 마실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귀가 시간 약속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말해두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신영이에게 꾸중을 하면서

걱정되고, 화난 내 마음은 아주 충실히 표현하면서도

신영이의 얘기는 듣지 않은 나 자신에게는 많이 아쉬웠다.

속상했다.

무엇 때문에 늦었는지,

그 원인이 된 일이 신영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지

나는 들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신영이가 카네이션을 아직 다 완성하지 못해서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오지 못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집에 온 뒤 아빠한테 카네이션에 대한 얘긴 충분히 하지도 못한 채

연락 없이 늦은 일에 대해서만 꾸중을 들을 때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일어났을지를 생각하자

내 행동에 대한 아쉬움이 아주 커졌다.

'내 얘기를 하기 전에 아이 얘기를 좀 더 들었더라면...'



신영이와 선율이에게 "늦었지만 스승의 날 편지 쓰고 잘까?" 했더니

"그래."하고 답한다.

신영이는 미처 다 만들지 못한 카네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색종이를 접고 오리느라 부산해진다.

선율이는 언니가 만들어준 카네이션 하나에 투명 테이프를 붙이고는

처음엔 하모니 선생님께만 드리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자기는 선물 안 하겠다고 한다.

수현이는 누나들의 종이, 가위, 테이프 같은 것들을 만져보려고 자꾸 다가가려 한다.

그래서 내가 안고 있었다.

한참을 공을 들여 신영이가 카네이션을 완성했다.

미안하고, 기특해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신영아, 세 가지를 모두 다른 모양으로 예쁘게 만들었네.

내일 선생님들께 드리자.

그리고 선율이는 선생님들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자."

신영 스승의 날 카네이션.jpg


아이들을 재우고 나니 10시 10분.

아내 없이 세 아이와 보낸 첫날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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