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한번 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에 써냈던 글인데.. 모임 언니들이 재밌다고 해주셔서 ^^;;
오랜만에 베이비트리에 한번 올려봅니다~~ ^^)
지난 일요일. 남편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근하자, 새벽부터 깨 있던 둘째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큰 아이는 그런 동생에게 이불까지 덮어주더니 쾌재를 부른다. 훼방꾼이 꿈나라에 갔으니, 벼르고 벼르던 놀이를 하겠다며. 원하는 대로 각설탕과 접시, 사인펜을 준비해주자, 받아든 아이는 각설탕에 색을 칠해 물에 녹이고 만들어진 설탕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드디어 기다리던 고요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읽다 만 책을 펼쳐 들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만큼 여유로웠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파스텔까지 꺼내 여기저기 가루를 흩날리며 요란하게 놀던 아이가 어느 새 내 앞에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뭐 하느라 이렇게 조용한 건지 궁금하던 찰나, 아이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예사롭지 않은 손가락의 움직임도.
“나일아, 뭐해?”
내가 묻자, 깜짝 놀란 아이가 휴대폰을 주며 말했다.
“아빠한테 문자 보냈어.”
“뭐? 진짜? 어떻게?”
너무 놀라 당황한 나와 달리, 액정화면은 남편에게 보낸 새 메시지를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오.빠.사.랑.해.언.제.와? ♡◈♧♤◇□☆’
헐. 딸아이가 ‘아빠’를 ‘오빠’라고 쓰며 마치 나인 것처럼 문자를 보내다니. 기가 막혔다. 평소에 무뚝뚝해서 애정표현이라곤 거의 안하는데 그런 나대신 ‘사.랑.해’라는 말에 하트와 별별 기호까지 써서 보낸 것이다. 하하하하.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딩동’ 문자메시지가 왔다. 남편이었다.
‘홍홍 저녁 먹으러 갈게 6시쯤 갈까 하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속는 남편이 재밌어서 웃고, 아이는 늦을 거라 생각했던 아빠가 온다는 말에 좋아서 웃었다. 이게 다 ‘사.랑.해’라는 말의 위력 때문인가? 바쁠 땐 저녁도 회사에서 해결하던 남편인데 집에 오겠다고 하다니. 나보다 딸이 훨씬 낫구나. 그래서 내친김에 답장도 아이에게 맡겼다. 그랬더니,
‘알앗써.밥밖게.서.먹.자’
라고 써서 보낸 것이다. 빵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밥은 집에서 먹어야한다고 타일렀다. 어제도 외식을 했고, 저녁 메뉴도 준비되어 있다고. 그러자 아이는 갑자기 새침해지더니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렸다. “왜~ 밖에서 먹게. 아빠가 좋아하는 걸로!”
호호, 요것 봐라. 분명 속마음은 그게 아닐 텐데~ 나는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아빠는 밖에서 먹는 것보다 집에서 먹는 밥을 더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때 또 다시 ‘딩동’.
‘당신 문자 스타일이 바뀌었네 암튼 그러면 여기서 5시 반에 출발할게’
아이는 또 다시 쾌재를 부르며 뭘 먹을지 고민했다. 언제는 아빠가 좋아하는 걸로 먹자고 해놓고. 나는 남편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내 지금까지 당신이 받은 문자는 딸이 보낸 것이고, 밥은 집에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찍어 사진으로 보내왔다.
‘깜짝 놀랐어요. 우리 나일이 대단해요’라는 말과 함께. 그걸 본 아이는 자기도 사진을 찍어 보내겠다며,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셀카에 ‘아.빠. 나.도.모,르.겠.어.요’ 라는 말을 써 보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인 딸에게서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아이의 애교에 녹아내린 남편은 흐물흐물 웃는 오징어가 되어 집에 왔다. 이래도 하하, 저래도 하하. 그동안 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도 모두 하하. 딸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빠! 나 그때 갔던 음식점에서 먹었던 카레 볶음밥이 먹고 싶어요”
남편은 단번에 “그래! 얼른 옷 입어!” 하더니 아차 싶은 듯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20분 남았다는 전자밥솥과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가리켰다. 남편은 큰아이에게 미안하지만 다음 주에 먹자고, 엄마가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러자 금세 토라져버린 딸. 남편은 나와 아이를 번갈아보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일아, 네가 왜 지금 카레볶음밥이 먹고 싶은지 얘기해줄 수 있어? 들어보고 꼭 먹는 게 좋을 것 같으면 엄마를 설득해볼게”
그러자 아이는 말로 하기는 좀 그렇다며 종이에 써서 나오겠다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사이 남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나가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냐고, 어떻게 아이 뜻을 다 받아줄 수 있냐고. 그러자 남편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혹시 아느냐, 이 기회에 아이가 밥을 잘 먹는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아니면 된장찌개에 질렸을 수도 있고.
마지막 말은 기분이 약간 상했으나 아이가 종이를 들고 나온 터라, 모두들 모여 앉았다. 나는 정말로 아이 입에서 ‘엄마가 만든 음식이 질렸다’는 말이 나올까봐 노심초사 하며 마른 침을 삼키는데, 아이가 써낸 것은 그야말로 예측불허, 상상초월이었다.
“별모양 : 가기, 네모 : 안가기, 세모 : 취소(이것도 안가기)”
라고 쓴 종이와 함께 별, 네모, 세모가 그려진 주사위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더니 한 번씩 던져서 많이 나온 모양을 따르자고. 남편과 나는 갑자기 ‘복불복 게임’이 된 이 상황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따져보니 안 갈 확률이 더 많을 것 같아 일단 주사위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모두 별이 나온 것이다. 그때서야 사태파악이 된 나는 “한 판 더!”를 외쳤고, 우리는 또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이번에는 별 두 개와 네모 하나. 망연자실한 나와 반대로 남편은 너무 재밌다는 듯 웃으며 외쳤다.
“이렇게 된 거, 가자!”
두 아이는 방방 뛰며 옷과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고, 나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3분 남았다고 울어대는 밥솥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고단수 딸아이 덕분에(?) 배불리 저녁을 먹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이제 잘 준비만 하면 되는 상황. 그런데 남편은 다시 일어섰다. 일이 많이 남아 회사에 가봐야 한다고. 나는 그런 남편에게 일밖에 모른다며 잠시 바가지를 긁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남편이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남편은 착잡한 목소리로,
“나일이가 그러는거야, ‘아빠, 오늘만 나랑 같이 잠들면 안돼? 내 소원이야’ 애가 소원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그 앞에서 나가겠어. 자는 척 했다가, 애들 잠들면 가야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편은 이날 새벽에서야 회사에 갈 수 있었다. 딸에게 얼른 자자고, 같이 잠들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고, 빨리 누우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나일이는 그래도 보고 싶은 책은 읽고 자겠다며 같이 잠들길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 가야 한다던 남편은 드르렁~ 코를 골며 가장 먼저 곯아떨어졌고, 이어서 둘째와 내가 잠들었다. 딸아이가 물을 달라, 이야기를 해 달라, 그랬던 것 같은데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동안 회사에서 쪽잠 자며 일하던 남편은 오랜만에 집에서 몇 시간 동안 달게 잘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남편을 요리하는 데 있어선 딸이 나보다 한 수 위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아, 여섯 살 딸에게 배워야겠다. ‘사랑해’라는 말을 적시적소에 쓰는 법과 애교를.
(남편 얼굴이 좀 많이 못생기게 나왔네요 ㅎㅎ 그래서 올립니다. 아는 사람이 봐도 못알아볼까봐 ㅎㅎ 사실 '지못미'남편에겐 비밀로 하고 올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