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돈을 많이 벌 거야
자식 낳아서 다 물려줄 거야
주먹보다 무서운 게 돈이래
빌딩 사서 세 받아서 살고파”누나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던
예전의 네 모습과 너무 달라
편하게 사는 게 다는 아니잖아
근데 원래 네 꿈이 뭐였지?”나 졸리지? 근데 늦게까지 안 자네? 설마 공부해?동생 (으쓱하며) 중간고사 기간이잖아. 공부 좀 하고 있었어.나 갓 제대한 복학생답네. 오랜만에 학교 가니까 어때?동생 군대 있을 땐 빨리 복학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별로. 과목이 맘에 안 들어.나 네가 선택한 거 아니야?동생 내가 고른 거긴 한데 전공 선택은 엄마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한 거기도 하지. 그리고 우리 과(소방방재학과)는 학기마다 들어야 하는 과목이랑 시간표가 정해져 있어서 학교에서 짜준 대로 들어야 해.나 아이고. 거기도 춥지? 오늘 아침에 학교 가는데 너무 춥더라. 그 동네는 훨씬 추울 거 같은데.동생 여기 엄청나게 춥지. 오늘 겨울옷 꺼냈어.나 근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축 처져 있어. 무슨 일 있어?동생 나 문과 나왔잖아. 일찌감치 내가 놓았던 것들이 요즘 날 괴롭혀. 화학식이나 고1 화학 시간에 잠깐 배웠던 ‘칼카나마알아철(K, Ca, Na, Mg, Al, Zn, Fe)…’ 이온화 경향 그런 거. 고1 때 선생님한테 회초리 따다다다 맞으면서 배웠던 거라서 좀 생각이 나는 거 같으면서도 손 놓고 있던 걸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 수업 들어가도 잘 모르겠고.(한숨)나 진짜 듣기만 해도 벅차다. 문과에 국문과 나온 나는 네 말도 뭔지 잘 모르겠어. 요즘 재밌는 건 없어? 오랜만에 학교 가서 설레고 신나고 뭐 그런 거.동생 딱히 신나고 그런 거보다 아는 사람이 엄청나게 줄었어. 학교에 아는 얼굴들이 별로 없어.나 너 축구 동아리도 하지 않았어?동생 열심히 했지. 근데 동아리 주축이었던 형, 누나들이 다 졸업해서 가긴 가는데 자주는 안 가.나 친구들은? 그럼 혼자 다녀?동생 아니, 학교에 있는 애들끼리 어울려서 다녀. 아, 내일은 고시국어 수업도 들어.나 고시? 옛날 시? 고전 시 배우는 거야?동생 아니 국가고시 할 때 그 고시. 학교에서 토익이랑 고시국어 이런 수업을 많이 열었더라고.나 너도 그럼 국가고시 보는 거야?동생 아니, 나는 설비기사·소방방재기사 자격증 따서 리조트 같은 데 시설팀에서 일하고 싶어. 누나, 영화 <타워>봤어? 거기서 스프링클러 같은 거 설치하고 그러잖아. 그거처럼 건물 안전시설 같은 걸 관리하는 거.나 근데 너 지금 무슨 공부 하는 중이었어?동생 고시국어. 수업 때마다 쪽지시험 보거든. 공부를 해야겠어서 하긴 하는데, 안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요즘 좀 싱숭생숭해.나 전공을 바꾸고 싶은 거야? 다른 거 하고 싶은 건 있어?동생 아니, 전공을 바꾸고 싶은 건 아닌데, 사실 하고 싶은 게 딱히 있지도 않아서 그냥 이왕 시작한 거 잘 마무리하고 싶어. 휴학도 웬만하면 안 하고 빨리 사회에 나가서 돈 벌게. 뭐라도 해서 돈 벌게. 밑바닥부터라도 차근차근 시작할래.나 뭔가 예전 네 모습이랑 너무 달라. 너 예전엔 밤 12시 다 돼서 기차 타고 홍대 가서 친구들이랑 밤새 놀다 새벽에 들어와서 아빠한테 혼나기도 하고, ‘학점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엄마한테 대들기도 했잖아. 용돈도 있으면 있는 대로 다 쓰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가 네 모토였던 거 같은데. 군대 다녀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건가?동생 아무래도 현실에 부딪쳐. 예전처럼 놀고먹어서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나 너한테 그런 소릴 들으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해.동생 이 각박한 세상 돈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움직이는 것도 다 돈이야.나 아… 너무 현실적이라 할 말이 없네.동생 그래서 난 돈을 많이 벌 거야.나 어떻게? 돈 벌어서 뭘 제일 하고 싶은데?동생 자식 낳아서 다 물려줄 거야. 좀 편하게 살라고. 내가 조금 먹고 살더라도 자식에게 7할은 줄 거야. 딴 건 없고 이 세상은 돈이면 다 되는 거 같아. 부대에서 친해진 선임 형이 만날 그랬거든. 주먹보다 무서운 게 돈이라고.나 (당황) 헉, 그 형은 원래 뭐 하는 사람이었어?동생 집이 되게 잘사는 형이었어. 그 형이 그랬어. “세상은 돈 있으면 부릴 수 있는 게 참 많다.”나 너는 그 형 말이 맞는 거 같아? 난 좀 아닌 거 같은데. 갑자기 영화 <베테랑>이 생각나네. 너 <베테랑>봤어? 거기서 ‘조태오’가 돈이 많아서 많은 걸 부리잖아. 네가 만약 ‘조태오’라면 어떨 거 같아?동생 솔직히 좋을 거 같긴 해. 돈 있으면 다 되잖아.나 넌 돈을 어떻게 쓰고 싶은데?동생 빌딩을 사. 세를 줘. 세 받아서 먹고살아. 또 빌딩을 지어. 세를 줘. 그걸로 또 먹고살아. 계속 그렇게 하는 거지.나 임대업을 하시겠다? 재벌 3세치고는 너무 소박한 거 아니냐.동생 그래도 그렇게 살면 편하지 않을까?나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사는 게 전부는 아닐 거 같은데. 다른 거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아, 근데 원래 네 꿈이 뭐였지?동생 내 꿈? 그러고 보니 나 꿈이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 뭐지? 아,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싶다. 어려워. 모르겠어 다. 공부하기도 어렵고 지치네.나 전화하다 보니까 왠지 더 우울해진 거 같아. 우리 정말, 어떻게 살지?동생 그러게. 우리 어떻게 사냐.1시간1분37초, 동생과 이렇게 길게 통화한 적은 처음이다. 통화하면서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난 달라졌다’는 분위기를 내뿜는 동생이 낯설었다. 지금 이 순간 즐거운 게 중요하다고 말하던 동생이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동생보다 훨씬 더 철이 덜 든(?) 것 같았다. 난 좋은 책도 꾸준히 읽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고, 내 생각을 내 언어로 말하고 싶은데.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이것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참 많은데.2년 전, 군대 가는 동생에게 인사치레로 ‘군대 가서 철 좀 들어 오라’고 말했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군대가 사람을 철들게 하는 집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군대의 본질 중 하나가 개인성을 억압해 모나지 않은 사람으로 모두를 평균화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막상 친구들이랑 돌아다니며 노는 것 좋아하고 쾌활하던 동생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제 그만 놀고 앞으로 어떻게 돈 벌어서 먹고살까 생각해야지” 말하는 순간 마음이 짠했다. 어떻게든 먹고살 수는 있을 테니 하고픈 걸 하며 즐겁게 살자고 말하는 누나보다 어떻게 먹고살지를 고민하는, 일찍 철들어버린 동생이 안쓰러웠다고 하면 늦은 밤 새벽 감성이 지나친 걸까.‘철들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 2년 전, 군대 가는 동생에게 철들어 오라고 말했던 걸 굳이 다시 따져보자면 ‘말을 좀 곱게 했으면, 부모님 고마운 줄도 좀 알고.’ 이런 걸 뭉뚱그려 당부한 거였다. 자기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생각할 줄 알았으면 하는 거였다. 그런데 군대에 다녀와 ‘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어. 더 ‘노(오)력’ 해야겠어’ 말하는 동생을 마주하니 이번엔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철든다는 게 현실에 잘 적응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만 궁리하는 거라면, 우리 철들지 말자.”
동생보다 덜 철든 제천의 누나
(*위 글은 2015년 11월20일 인터넷한겨레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