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요즘 유치원마다 학교마다 운동회가 한창입니다.
지난 주엔 큰아이의 초등학교 운동회,
이번 주말엔 작은아이 유치원 운동회가 있어 아이들은 너무 즐거워하는데
엄마인 저는 2주에 걸친 도시락 스트레스 땜에 가을 탈모가 장난이 아니라는;;
아빠와 아이들이 기대하는 운동회 도시락은 ...
대충 이런가 본데,
해마다 운동회날, 제가 만든 도시락 뚜껑을 열 때면
3초 정도 정적이 감돌며 식구들의 실망하는 눈치가..;;^^
일본 엄마들은 운동회 도시락을 왜 그리 열심히들 싸는지.
운동회 끝나고 나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났는가로 수다가 오고가는데
5시에 일어났다, 그러면 늦지않냐 4시에 일어났다.. 등등
부실한 저의 도시락엔 다 이유가 있었나 봐요. 7시에 겨우 일어나서 대충 싸니 뭐..
암튼! 이번 운동회엔 재밌는 일이 있었어요.
4학년인 큰아이가 한국 노래로 단체 댄스를 한다고 하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막상 운동회에 참석해서 보니, 일본 초등학교 운동장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쩌렁쩌렁 울려퍼지더군요.
4학년 아이들이 모두 신나게 말춤을 추고,
학부모들은 "어머, 강남스타일이잖아!" 그러면서 다들 즐거워했답니다.
운동회 프로그램에 '강남' 대신 학교 이름을 넣어 '00스타일'이라고 쓰여있었어요.
요즘 이런저런 일들로 한일관계가 싸늘한데도
아이들은 아직 크게 못 느끼는지 마냥 신나하더군요.
큰아이는 그래도 자기가 좀 한국어를 안다고 친구들에게 노래 가사 해석해주고ㅋㅋ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 분 한류열풍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언어가 큰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일본인들에게 한국어는 무척 감성적이고 매력적인 언어로 이미지를 완전히 굳힌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 아줌마들이 머리잡고 싸우는 장면은 빼구요^^,
대신 이런 부분은 꽃미남 배우들이 감성+달콤 대사로 커버를 해주고 있죠)
올 봄에 JYJ가 도쿄 돔에서 콘서트를 할 때,
팬들에게 일본어로 쭉 이야기를 하다 김재중이 좀 답답했는지, 갑자기
한국어로 "저 쪽에 조명 좀 켜 주세요~" 그랬을 뿐인데
일본인 팬들이 그 말 한마디에 환호성을 지르며 다들 쓰러질려고 하더군요.
요즘 한류 스타들이 일본어를 잘 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인이 가장 근사하고 멋있어 보일 때는, 유창하고 품위있게. 한국어를 구사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일본인들도 그런 말 많이 하죠. 열심히 듣는 팬들을 위해 일본어공부하고
말해 주는 건 너무 고맙지만, 그래도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걸 듣고 즐기고 싶다! 라구요.
내용을 다 알아듣진 못한다해도 그 언어만이 가진 이미지, 리듬, 감성을 즐기고 싶을 거예요.
제가 한류 평론가도 뭐도 아닌 그냥 일본에서 아줌마로 살지만,
감히 한류의 미래에 대해 한마디하자면
외국어를 열심히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만큼 한국어를 정말 품위있고 아름답게 구사하기 위한 노력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 언어를 잘 모른다 해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자신의 모국어이긴 하지만, 유난히 리드미컬하게
듣기좋게 말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않나요.
늘 일상적으로 만나는 일본인 중에서도
유난히 표정도 밝고 발음도 정확하고 자기 논리도 분명하면서도 감성적인 표현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아름답게 일본어를 말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만날 때마다 기분이 참 좋답니다.
분홍구름 님이 요즘 아이들이 쓰는 말에 대해서도 쓰셨던데
저도 한글날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도쿄 돔은 몇 만 명을 수용하는 크기라던데
이 수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어 한마디에 이렇게 열광하는 순간을,
초등학교에서 한국 노래에 맞춰 일본인들이 춤추는 광경을,
100여년 전 이곳에 사시던 재일 조선인 분들은 상상이나 하셨을까요..?
외국에 머무는 세월이 쌓여갈수록
모국어에 대한 고마움과 소중함이 새록새록 들어서
고등학교 때 영어사전을 a부터 한 쪽씩 공부하는 게 유행했던 기억이 나서
국어사전을 ㄱ부터 그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올해 새해목표 중에 하나가 그거여서
부엌에 국어사전을 두고 국이나 찌개 끓는 거 보면서 한 낱말씩 보곤 했는데.
진도가 너무 더디긴 하지만 내년에도 쭉 해볼까 하고 있답니다.
설날이 가까운 어느 날, 사전에서
'가래떡'을 읽을 차례가 되었는데, 너무 신기한 경험을 한 기억이 나요.
글쎄, 사전 속의 가래떡이란 글씨 위로 모락모락 김이 나지 뭐예요!
명절 즈음마다 도지는 향수병에 어머! 내가 왜 이러지! 그랬는데
모국어란 그런 건가 봅니다.
어릴 적, 시골 방앗간에서 보았던, 하아얀 김을 뿜으며 기계에서 빠져나와
찬물에 풍덩 빠지던 그 가래떡의 이미지가 글자 뒤에 떡 버티고 있는 것.
외국어에는 유년기가 없다는 말, 그래서 나온 말인가.. 싶었답니다.
아! 몇 달 안 남은 올해와 내년에도 쭉- 국어사전 읽기 계속 해보고 싶네요.
열심히 읽다보면 육아일기를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