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 전 주말, 인근에서 농촌우수마당극큰잔치가 열려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다.
3일 동안 낮에는 솟대 만들기, 탈 만들기, 장승 만들기 같은 아이들을 위한 체험 활동이,
밤에는 탈춤, 북춤, 풍물, 택견 시범, 마당극과 가족극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특히 둘째 날 택견 시범에는 동네 언니, 오빠들이 나와서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택견 시범이 끝나고, 탈춤이 이어졌고, 곧이어 마당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원형 극장의 맨 뒷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던 신영이가 맨 앞으로 가고 싶어 했다.
앞쪽에 동네 언니, 오빠, 친구들이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공연 중이었기 때문에 신영이에게 '공연 보는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가지 말고, 저 옆쪽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신영이는 내가 말한 쪽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런데 그쪽은 무대와 가까워 공연 진행팀에서 통제하고 있었다.
신영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결국 앞자리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영이를 내려보냈다.
신영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내려가 언니, 오빠들이 있는 맨 앞자리에 가 앉았다.
신영이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가 너무 조심스러운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살짝 스치기도 했다.
'내가 아이에게 예의나 배려 같은 걸 너무 강조해서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며 사는 건 아닌가?, 그래서 아이가 자신감이 약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부모로서 아이가 지금 모습보다 조금 더 자신감 있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셋째 날에는 신영이, 선율이와 탈 만들기 체험 활동에 참가했다.
신영이는 혼자서 토끼 탈에 반죽을 입히는 데 열중하고 있었고,
선율이는 조금 하다 지루해 하길래 내가 거의 대신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비켜주세요."
그 아이가 지나갈 수 있게 몸을 돌려 길을 터 주고 다시 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묘하게 '비켜주세요'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신영이랑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의 그 말은 참 당당하게 들렸다.
바로 그때, 내가 어제 신영이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아쉬워 했던 바로 그 '자신감'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비켜주세요'라는 말을 생각할수록 개운치 않은 기분이 자꾸 남아 있었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그 아이가 당당해 보이면서도 왠지 찝찝한 건 무엇 때문이지?'
생각해보니 '비켜주세요'라는 말에 자신감이나 당당함은 있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자기가 조금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른에게 '비켜달라'는 부탁의 말을 하면서 상대에 대한 미안함이나 주저함 없이 자기가 그쪽으로 가는 게 마치 당연한 것인 양 행동했던 것이다.
다급한 상황이었다면 '비켜주세요'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급하지도 않고, 돌아갈 길이 없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체험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
'지나가도 될까요?'나 '조금만 비켜주시겠어요?'가 아닌 '비켜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6~7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린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켜주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배웠다면
'지나가도 될까요?'라고 상대 입장을 헤아리고,
상대의 양해를 구하는 말은 왜 배우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물론 그 아이가 아닌 아이의 부모에 대한 아쉬움이다.
더구나 그 행사가 리더십 캠프나 토론 캠프가 아니라(요즘엔 리더십이나 토론 캠프에서도 나눔이나 배려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고 들었다.) 문화적 감수성을 키우는 마당극큰잔치인 상황이었기에 그런 아쉬움이 더 들었던 것 같다.
문화적 감수성은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에 공감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부모로서 우리 아이가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신영이가 지금보다 좀 더 당당한 아이로 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게 '비켜달라'고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돌아갈 길이 있고, 그쪽을 가로질러 가는 게 상대에게 폐를 끼치는 일임에도 '비켜주세요'라고 말하는,
제 요구만 할 줄 알고,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에 무신경한 아이로는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