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 / 가족] 
명절에 슬피 울던 그가 이곳으로 올지 모른다

▷ 온 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한가위입니다. 집집마다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겠죠. 이런 좋은 날 “부모님께 짐이 되어 죄송하다”며 애처로운 고백을 토하는 사내가 있습니다. 한가위 둥근 달 아래 이 사내의 처지만 그러하겠습니까. 서울에만 전체 가구 5분의 1이 독신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족에게 결혼은 금기어일 테지만, 이들이 안 보이는 자리에선 가장 절실한 주제일 것입니다.

한가위는 누나·여동생 가족이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는 날
조카 넷이 저와 놀자고 하면서
“결혼 안해?” 청문회를 엽니다
저보다 더 힘들지도 모를
(노)처녀·돌싱 여러분…
언제든 전보를 쳐 주세요

나는 노총각입니다. ‘노총각’이란 고은 시인의 “올라갈 땐 못 본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라는 노래마따나-내용은 반대지만- 불현듯, 운명처럼 아니 벼락처럼, 그러나 저주로, 하여 허무하게 자각하게 되는 처지입니다. 출근길 몰랐는데 퇴근길에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노총각이다.’

한 직장 선배는 남자 나이 콕 집어 38살에 ‘제2의 전성기’가 온다고 삼십대 초반의 내게 말해줬습니다. 그 말만 믿고 젊음과 유희를 유보했던 건 아닙니다. 깜냥껏 곁눈질하고 지분거렸고, 사랑했지요.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노총각입니다. 해심으로 함께 노를 저어 나가자던 여인들 전부 나의 쪽배에서 내려 대저 꽃배에 올라탔습니다. 38살? 전성기는커녕, 인생 기우뚱 갸우뚱 뒤집어지려는 전복기입니다. 기왕지사 저 꽃배들도 다 뒤집어졌음 좋겠습니다.

나는 비뚤어진 노총각입니다. 누군가 넌 아직 젊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분들이 마흔이고 마흔여섯이기 때문이지 제가 정말 젊어 그런 건 아니란 생각입니다. 친구들 자식 자랑할 때 미안하지만 아들이 부모의 삶을 짓밟아버린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생각합니다. 친구들의 카톡은 모두 자녀들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불임에 무정자증 많고, 도시는 온통 야근에 스트레스투성이라 출산도 쉽지 않다고들 하는데, 어쩜 지인들은 하나같이 풍선껌 불듯 아내의, 자신의 배를 불리고, 쌍둥이나 아들딸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직장 후배가 “선배, 돌싱 만나볼텨?” “형, 오늘 술 좀 사줘. 재밌게 놀자”라고 카톡을 보낼 때마다 그 말풍선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후배의 어린 아들 녀석(사진)이 다 엉큼해 보입니다. 어린 꼬마가 저한테 ‘아저씨, 돌싱 만나볼텨? 재밌게 놀자’ 옹알대는 것 같습니다.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

삼십대 사랑이 실패하면 노총각입니다. 삼십대 사랑이 실패하면 노처녀입니다. 수천년 빙하가 짠 볕에 붕괴되듯 삼십대 복판이 침식되기 때문입니다. 이후 나는 어떻게 다시 연애를 시작해야 하는지, 할 수 있을지 조금 막막해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선 “널린 게 여자다” “다 똑같다”고 합니다. “널린 게 남자고, 다 똑같다”는 말과도 같겠지요. 난 다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인들은 주제넘게 눈이 높다고 책망하지만, 전 높은 게 아니라 까다로운 거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내몰리며 당도한 노총각인데, 그 까다로움을 이제 와 포기합니까, 양보해야 합니까? 어머니, 대답해주세요!

맞습니다, 한가위는 저의 명절이 아닙니다. 포근한 달이 아파트를 비추고, 형제자매가 어깨를 부딪치며 전을 부치고, 부모님께 달달한 소곡주라도 한잔 드리며 건배하는 9월 말 무렵 난 그냥 윗목에 찬밥처럼 웅크려 있을 겁니다. 제가 있으면 가족의 대화 소재가 반토막 나요. 결혼은 이제 금기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두 딸을 키우는 매형과 딸 아들을 키우는 매제가 저와 나눌 만한 얘기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 인사나 좀 나누고, 제 방으로 가지요.

26살에 장가를 보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아버지로선 억장이 무너질 일일 텝니다. 이기적 불초자가 어찌된 영문인지 죄스러운 마음을 가질 즈음, 전 노총각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5년 전 대선 정국 때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소개란에 가장 행복한 때로 ‘손자를 보았을 때’가 적혀 있었습니다. 소스라쳤지요. ‘이분에게 땅보다 소중한 게 있구나. 그게… 손자구나.’ 지난주 <한겨레> 토요판에 실린 김석희 번역가의 인터뷰 기사에서 김 선생이 일평생의 유산 2가지를 꼽는데 하나가 제주에 쌓아올린 집이고, 하나는 손자였습니다. 또한 충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어떤 결함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는 지인들의 시선이 지레 못마땅한 모양입니다. 저 역시 그 시선이 ‘난 축의금 안 갚아도 되네’ 하며 짓는 눈웃음으로 오긴 합니다. 어머니는 이제 슬쩍 “애라도 먼저 데려오라”고 결혼사를 눙치며 더 먼 황야로 절 떠밀고 계십니다. 지난해 온 가족이 모여 한참 유쾌해했던 대화 중 하나는 누이가 수개월을 대기한 끝에 용하다는 이로부터 받아온, 제 팔자에 애가 둘이 있더란 점괘였습니다. 어디… 있니, 케빈?

그러니 한가위는 누나의 가족, 여동생의 가족이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는 날입니다. 조카 넷이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떨다 지치면 하나둘 내 방으로 와 침대에서 뛰고, 쌓아둔 책들을 들추고, 노트에 낙서를 합니다. 저와 놀자고 합니다.

그러다 불쑥 동생의 첫째 아이가 묻습니다. “삼촌은 왜 결혼 안해요?” 누나의 둘째 아이가 맞장구를 칩니다. “삼촌, 결혼 언제 해?” 첫째 아이는 ‘여자’가 있는지 제 휴대폰을 검색합니다.

우리 가족 참 지능적입니다. 조카들에게 사주한 것인지, 조카들도 가족의 완성태를 조부모·부모와 같은 방식으로 꿈꾸게 된 건지 구별할 수도 없게 우회하여 결혼을 압박합니다. 조카는 또 어떻게 대적해야 하는 겁니까. 이런 말을 해줘야 할까요? “응, 얼마 전 삼촌 회사 후배가 삼촌한테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후배가 막상 여자분한테 물어보니 그랬대. ‘요즘 전 나이 많은 분을 만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쩐다. 그치~.”

한가위는 여러분들끼리 즐기세요. 달도 외로움이 의무감을 키우고, 의무감이 외로움을 키워 한가위엔 저리 더 큰 것이겠지요. 민족의 명절, 절 품어줄 모든 여인들께 시나 한수 지어 바칩니다.

“그가/ 이곳으로 올지 모른다// 구시월 달빛에/ 드리운 여인의 그림자로/ 발없이 닻없이/ 맨살치도 못채는 가을로/ 수염이 난 뒤부터/ 부랴 길 내거나 치장할 사치가 없다/ 빗방울 투툭툭 해일이 되어/ 꿈꾸던 항해마다 침몰할지언정/ 산은 산에 이고/ 물은 물로 지니/ 마도로스 또 담뱃불 붙이고 섰다/ 찬바람 불어 저마다 방문을 걸어닫는대도/ 고샅길 말뚝박힌 소처럼/ 눈이나 꿈뻑일 것이다/ 그러니 그러나/ 등돌리며 운명을 묻는 이에게/ 들리려는가, 눈가에 서린 말 ;// 기다렸습니다./ 기다려주세요.”(<가을의 전보>)

명절 맞아 저보다 더 힘들지도 모를 (노)처녀·돌싱 여러분도 울지 마세요. 언제든 전보 쳐 주세요. 그리하여 이 무지막지한 칸델라의 보름달을 버티기로 해요.

서울/키 176㎝, 몸무게 64㎏의 30대 후반 남성

demianis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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