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업무가 많아 아이들과 피서 다운 피서를 다녀오지 못한 게 미안했는지
아내가 내게 물었다.

아내: 이번 방학 때 아이들 데리고 어딜 좀 갈까?
나: 아, 안 그래도 자기한테 말 하려고 했는데... 
     내가 보니까 신영이가 미술이나 기획 같은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꾸미기 하는 걸 좋아하고, 
     이벤트 같은 걸 구상하는 일을 아주 좋아하며 하더라.
     며칠 전에 그린 그림에는 여자 아이들을 그냥 예쁘게만 그리는 게 아니라 
     거기에 축포 터지는 효과까지 집어넣더라구, 장식 테이프 붙여서. 
아내: 맞아, 신영이는 정말 그런 일을 좋아하고, 잘 해. 
     어제 당신 외출했을 때 신영이, 선율이가 준비한 축하 이벤트 있잖아. 
     애들이 당신 나가면서부터 그걸 준비한 건데,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즐겁게 준비하는지 내가 다 놀랐다니까. 
나: 그래서 이번 방학 때 파주 헤이리 마을이나 중앙 박물관의 이슬람 보물전, 
     어린이박물관 같은 데 데려가면 좋겠어. 
     신영이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 있으니까 
     그런 쪽 환경에 아이를 노출시켜주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아.
아내: 그래, 좋은 생각이야. 집에 가면 신영이, 선율이랑 상의해봐야겠다.


아내와 여기까지 대화를 나눈 뒤 난 볼 일이 있어 1박 2일 동안 서울에 있었다.
그동안 아내가 신영이, 선율이에게 여행 갈 수 있는 세 곳에 대해 말해주고
어디로 가면 좋을지, 뭘 가져갈지, 뭘 먹을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아내는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 신영이와 선율이가 여행 계획을 짜서 가져왔다는 거다.
신영 선율 여행 계획.jpg
이름 해이리(헤이리) 마을
먼저 해이리(헤이리) 마을 가고 그리고 잠 숙소애서(에서) 자기
또 점심 동가스(돈가스) 피자 저녁 빵(썼다 지움) 만두
그리고 서점(북카페) 코코이(코코아) 먹기 마싯겠다(맛있겠다)
옷 챙기기 그리고 용돈 가저가야대(가져가야 돼) 또 차 타고 가기 
선율 수현 엄마 아빠 신영

집에 돌아와 아이들이 짠 여행 계획을 보면서 흐뭇했다. 
신영이, 선율이가 자기들이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서 상의하고, 
의견을 조율해서 계획을 세웠다는 게 놀랍고, 기특했다.
특히 신영이가 주도적으로 계획을 세우면서도 
동생이 다른 의견(만두)을 제시하자 자기 생각(빵)을 양보하고 
동생의 의견을 반영해주었다는 점도 대견했다.


그리고 이날 밤, 아내에게서 지난 금요일에 신영이, 선율이가 
나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자기가 나가려고 준비할 때부터 신영이가 나한테 귓속말로 속닥속닥 거려.
그래서 내가 '신영아, 잘 안 들려. 크게 말해봐.' 그랬더니 
신영이가 나를 힐끗 보면서 아빠 나가고 나서 말해야겠대.
자기 나간 뒤에 들어보니까 '아빠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 하자'는 거야.
처음에는 종이학을 접어서 아빠한테 던저주자고 하더라구.
그리고 호박도 종이접기해서 주고.
그 다음에는 춤을 춰야겠대. 그래서 선율이랑 같이 'Oh' 노래로 연습을 하는 거야. 
그러더니 이건 안 되겠대.
그리고는 귀요미 송을 해야겠대. 둘이 연습을 해보더니 선율이가 아직 잘 못하니까 
이것도 안 되겠대.
그래서 계획을 또 바꿔.
이런 식으로 두 시간 동안 계속 계획을 바꿔가면서 준비하는 거야.
자기들이 숨어 있다가 아빠를 깜짝 놀래켜줄테니까 
엄마는 거실에서 아빠를 맞이하되 자기들 얘기는 하지 말라는 둥,
불을 꺼야 되는데, 불을 꺼도 낮이라 환하잖아. 그러니까 불을 더 끄면 안 되냐는 거야. 
이게 불을 다 끈 거랬더니 '그럼 안 되는데...' 하면서 
깜짝 놀래키려는 계획은 접었어.
좀 이따가 '엄마, 좋은 생각이 났어!'하면서 다시 얘길 하는 거야.
청소를 해야겠대. 
'아빠는 깨끗한 걸 좋아하니까 집안이 깨끗하면 아빠가 깜짝 놀라고 좋아할 거야.' 
그러는 거야.
그때부터 한 30분을 청소하는 거야. 
그렇게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아빠 언제 오냐고 물어.
그리고 나서는 꾸미기를 해야겠다는 거야.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오려붙이고 하면서 나한테도 종이를 주면서 꾸미라는 거야.
내가 편지를 쓰니까 그게 아니고 꾸미기라고 하면서 편지 쓴 부분 밑으로 선을 긋고,
그 밑은 예쁘게 꾸미라는 거야.
이런 식으로 자기가 나가고 나서 오는 시간까지 
이렇게 이벤트 준비로만 시간을 보냈다니까.
그러다가 차 소리가 나니까 숨으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러지 않아도 되고, 차 문 닫는 소리 날 때 숨으면 된다고 말해줬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학은 어디에 담아서 뿌리지?'하길래 내가 봉지를 하나 찾아줬지.
그래서 자기 왔을 때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봉지 안에 담은 학을 짜잔~ 하면서 뿌렸던 거야.

그런데 이렇게 두 시간 넘게 열심히 준비한 거에 비해서는 
자기가 돌아온 뒤에 그걸 보고 좋아하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잖아. 
신영이가 '아빠, 봤어?'하면서 당신이 어떻게 봤는지 엄청 궁금해 하기도 했고.
당신이 좋아하고, 고마워 하긴 했지만 당신이랑 내가 곧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신영이의 이벤트에 대한 얘기는
신영이가 기대한만큼 충분하게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을 것 같더라구.
그래서 당신 서울에 가 있는 동안 신영이한테 일부러 그 얘길 더 해줬어.
"신영아, 아빠가 신영이가 해준 이벤트가 아주 좋았는지 
'엄청 감동받았고, 기뻤고, 놀랐다.'고 했어.
아빠 입이 귀에 걸렸더라. 엄마가 보니까 엄청 좋아하던데?"
그랬더니 신영이가 약간 쑥스러워 하면서 좋아하는 거야.
그때 신영이가 허전했던 게 좀 채워지는 것 같더라구. 
신영이는 '엄마 아빠가 자기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내가 엄마 아빠를 위해서 뭘 해줄까' 구상하는 애거든.
 

아내의 얘길 듣고, 그날 신영이에게 더 충분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게 
무척 미안해졌다.
아빠가 좋아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을지 상상하니
그 정성이 참 고마웠다.
그리고 신영이가 특히 그리고, 만들고, 꾸미면서 만드는 이벤트를 기획하는 데 
소질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 
일단 결정하고 나면 너무나 쉽게 뚝딱 하고 만들어냈다고 하니
신영이의 솜씨가 참 놀랍고, 신기하다.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보면서 그런 관심과 소질을 잘 살려주고 싶다.

그런데 마음 한 켠에는 경계심도 생긴다.
'아이의 재능을 찾는답시고 부모가 보고 싶은 것 위주로, 
혹은 부모가 바라는 재능을 더 크게 보는 건 아닌가?'하는 염려도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신영이는 이제 일곱 살일 뿐이고,
너무 어렸을 적엔 잘 보이지 않았던 흥미나 소질이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말아야겠다.
오히려 아이가 좋아하고, 즐거워 하는 일을 발견할 수 있는 걸 기쁘게 여기고,
그런 관심과 흥미를 키워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며 뿌듯함을 느끼고 싶다.
아이가 타고 난 본성대로, 
자기만의 고유한 자원을 키워가며 자랄 수 있도록 
부모로서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보면 될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네 안에 무엇이 들어있니?'라는 물음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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