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남의 남편들

살다 보면 예고도 없이, 남의 남편이 내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다. 가령 산후조리원 때. 불야성은 딱 산후조리원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방마다 불이 켜졌다 꺼졌다, 아기 울음소리 빽빽 나고, 아기 아빠들은 산모 심부름 하느라 한밤중 좀비처럼 수시로 복도를 들락날락 배회했다. 거친 스파르탄 감금젖소 조리원 생활 중에도 남의 남편 구경은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부부로서의 어울림 정도를 보는 것도 흥미롭고, 아이 낳은 직후라 서로 가장 사랑하는 시기여서 부부 사이가 흐뭇하게 하트모양인 것도 보기 좋고, 아기가 누구 닮았나 관찰해보는 것도 즐거웠다. 집에서 입는 그대로의 옷차림, 늘어난 티셔츠에 추리닝, 까치집 머리를 하고 부스스 자다 깬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들을 비듬머리에 내복 비어져 나온 잠옷에 안경과 복대 차림으로 어두컴컴한 복도의 급수대 앞에서 어색하게 마주쳤다. 물론,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제아무리 신사숙녀라 할지언정 결코 서로 가볍게 인사를 하거나 재치 있는 농담을 주고받거나 전화번호를 슬그머니 건네거나…는 안 한다. 다만 그들이 유리창 너머로 자기 아기를 한번 더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뻐근한 듯 목 회전 운동을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조금 짠했다.

공항의 유아휴게실에서도 나는 그들을 느꼈다. 공항의 유아휴게실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있는지 없는지도 전혀 의식 못하던 공간. 하지만 지금은 공항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 되어버렸다. 면세점 쇼핑을 안 하니 남편을 흡연장소로 보내놓고 아이를 이곳에 풀어놓는다. 이곳처럼 공항에서 조용한 곳도 없다. 고작해야 두 팀 정도이고 주로 아빠와 아이 조합이다. 엄마들은 아마도 신나게 면세점 쇼핑을 하고 있을 터.

유아휴게실에서 보는 남의 남편들도 몹시 지쳐 보였다. 아내 앞에서는 저것보다는 밝은 표정을 보일 테지만 내가 훔쳐본 그들의 표정은 의무감으로 점철된 묵묵한 짜증이 느껴졌다. 아내가 없는 사이 아이에게 간간이 조심을 시키거나 물을 먹이거나 화장실 뒤처리를 할 때도 목소리엔 묵직함이 스며 있었다. 내 남편은 모르지만, 난 가끔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쪽 공기가 너무 무거워 보여서. 공통의 화제 따윈 얼마든지 있다. 남의 남편은 대개 늘 친절하니 내가 말을 걸면 흔쾌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만 좀전의 칙칙했던 얼굴이 환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대단히 육아에 동참하는 양, 육아토크에 애써보지만 굳이 그렇게 좋은 아빠인 척은 안 해도 척 보면 안다. 난 다른 남자의 아내니까 괜찮아, 다 모른 척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이윽고 입구 유리문 쪽에서 소리가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 쌩깠다. 하지만 우리는 늘 남의 남자와 여자에겐 너그러우니 말 안 해도 다 이해를 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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