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한겨레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칠순을 넘기신 어머니가 젊은 시절의 고생담을 늘어놓으실 때면 으레 그 신세 한탄의 첫 구절은 “그 흔한 뽀뿌린 치마 한번 못 입어보구…”로 시작한다. 포플린 옷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 가난한 신접살림을 시작하신 탓에 그걸 못 걸쳐본 게 평생의 한이셨던 모양이다. 그 한을 풀려는 듯 어머니는 내가 예쁘게 차려입고 다니는 걸 보고 싶어 하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체크무늬 주름치마와 레이스가 달린 흰 블라우스를 사주셨는데 깡총한 단발머리에 엉성하니 그 옷을 걸치고 찍은 입학사진은 지금 봐도 우습지만, 어머니 눈에는 그런 딸의 모습이 마냥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 입학식 이후 두번 다시 그 옷을 입어보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 캠퍼스에 최루탄이 날고 친구들이 끌려가고 그중 몇이 죽기도 하는 상황에서,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건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여대생’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 여성스러워도 안 되고 대학생스러워도 안 될 것 같은 맘에, 대학 시절 내내 나와 내 주변 여자친구들은 운동화에 면바지, 티셔츠 차림 일색이었다.

세월이 흘러 오십 줄에 들어선 나는 예전에 어머니가 “뽀뿌린 치마 타령”을 했듯 농반진반으로 “빨간 미니스커트 타령”을 해댄다. 한창 젊을 때 빨간 립스틱 한번 못 발라보고 미니스커트 한번 못 입어봤다는 신세 한탄이다. 누가 강제해서 못한 것도 아니면서 유행가 자락처럼 툭하면 푸념을 해대니, 선배 언니 하나가 “에라, 까짓것 그렇게 한이면 더 늙기 전에 해보자”고 객기에 불을 지폈다.

결국 마흔 중반부터 쉰 중반까지 미국에 머무는 아줌마 여섯명이 ‘빨간치마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공모를 하기에 이르렀다. 맨해튼 한복판에서 빨간 치마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만나 하루를 잘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날만큼은 남편도 자식도 다 ‘팽개치고’ 온다는 부칙도 세웠다. 십대 소녀로 돌아간 듯, 킥킥거리고 가슴 설레어 하면서 디데이를 맞았다. 평생 빨간 원피스에 짙은 화장 같은 걸 해본 적 없는 촌스런 아줌마들의 유쾌한 일탈! 새색시 신방 들어서듯 두근거리며 접선 장소에서 만났건만, 도시 한복판 제각기 알록달록 반짝거리는 옷차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리의 빨간 원피스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거리는 빨간 옷 천지였고 심지어 맨해튼 청소부들의 공식 복장도 빨간색이었는데 아마 누군가 우릴 봤다 해도 무슨 어머니 합창단의 유니폼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저녁을 먹은 다음 친구 집에 뒤풀이 차 모인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화장을 지우고 꽉 조이던 원피스를 벗어던졌다. 파자마 바람에 시원한 수박을 나누면서 “아이고, 살 것 같다” 낄낄거리는 동안, 삶은 그다지 비장할 것도 무거울 것도 없어 보였다. 대담한 공모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촌스런 친구들과 같이 늙을 수 있어 난 즐겁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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